제6절 첨단기술과 영상문화(1986-1990)

1) 올림픽과 TV광고

1986년은 한국에서 광고가 시작된지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그리고 아시안게임이 개최된 해이기도 했다. 아시안게임의 열기와 함께 1987년에는 단임제의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고, 1988년에는 서울올림픽이 열렸다. 이 기간동안 한국의 경제는 유가의 하락과 달러화의 약세, 국제금리 하락이라는 삼저 현상이 힘입어 호황기를 맞고 있었다. 1988년 무역수지는 역사상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고, 경제성장률 또한 16.5%에 이르렀다. 광고 역시 전반적인 호경기와 함께 올림픽의 특수현상까지 가세해 폭발적인 증가세를 나타내고 있었다. 스포츠는 역시 TV 매체에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스포츠에 대한 관심과 함께 온 국민의 시선이 TV로 집중되었고, 그 기회를 활용하기 위해 올림픽 공식 후원업체를 중심으로 한 TV광고가 미처 수용이 불가능한 상태로까지 증가되었다.

1988년의 방송 광고비는 예년의 수준을 훨씬 뛰어 넘는 24%나 성장하였다. 사회 전체의 호경기와 함께 광고업계 역시 일종의 축제와 같은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적인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광고업계의 일각에서는 몇가지 불안한 문제들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첫번째 문제는 매체부족 현상에 따른 수요공급의 불균형 상태가 매우 심각한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국내 경기의 활성화와 올림픽이라는 다시 없는 이벤트에도 불구하고 많은 광고주들이 광고 방송시간을 확보하지 못해 애를 태우지 않으면 안되었다.

두번째의 문제는 그 동안 간접적으로만 언급되던 광고시장의 개방에 관하여 미국을 중심으로 국제적인 압력이 구체화 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88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고조되어 감에 따라 소비시장으로써의 한국의 존재가 외국기업에 크게 부각되었다. 상품시장에 대한 개방요구가 강화될수록 광고시장에 대한 압력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87년 10월 1일부터 외국 대행사의 49%의 합작투자가 허용되었다. 그것은 한국의 광고시장이 외부의 압력으로부터 더 이상 보호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세번째의 문제는 소비자들이 스스로의 권익에 대해 강력한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소비자 보호법이 강화됨에 따라 광고에 있어서도 정확한 근거와 자료가 요구되었다. 1989년 9월 허위, 과대 광고를 했다는 이유로 5대 제약회사의 광고 책임자가 구속되고 31개 유명 제약회사가 입건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에는 비식용 쇠기름 파동으로 5개 라면회사의 간부가 구속되는 사태가 발생되기도 했다. 광고, 특히 TV광고에 대한 소비자 단체의 감시가 엄격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네번째로는 저작권 보호법이 발효되어 더 이상 외국의 영상자료나 음악 등을 임의로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는 점이다. 외국의 자료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액의 사용료를 지불해야 했으며, 더욱 큰 문제는 사용허가를 얻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해졌다는 점이다.

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경제, 사회적인 축제 분위기와는 별도로 서서히 한국의 광고업계에 몇 가지 불길한 조짐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2) 변혁기의 CREATIVE

80년대 후반 한국 TV광고의 creative를 살펴보면 몇 가지 특징적인 경향을 발견할 수 있다. 첫째로 첨단기술을 활용한 광고가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80년대의 전반이 칼라 영상제작을 위한 수습기였다면 80년대의 후반은 기술적인 응용기이며 발전기였다고 할 수 있다. 80년대 초반 약 5년의 기간 동안 칼라 영상의 색 재현과 질감의 문제를 극복한 크리에이터들은 그 다음의 단계로써 표현의 차별화를 추구하였다. 특히 그러한 경향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어 주었던 것은 미국과 일본의 TV광고에서의 이미 보편화되고 있던 computer 영상 기술이었다.

한국에서 본격적으로 시도된 computer 영상광고는 금성사의 "테크노피아"와 삼성전자의 "휴먼테크"였다. 물론 처음부터 한국의 기술로 제작된 것은 아니었다. "테크노피아"는 일본에서 제작되었고, "휴먼테크"는 미국의 기술로써 제작되었다. Computer로 만든 TV광고가 국내에 최초로 방영되었을 때 모든 시청자는 새로운 형태의 영상에 대해 일종의 충격을 받았다. 컴퓨터로 표현해 낸 공상과 같은 이미지의 표현과 인간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로보트의 액션은 단숨에 소비자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테크노피아"와 "휴먼테크"를 통하여 computer 영상 기술이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대중들도 실감하게 되었다. 곧 이어 보리 음료 맥콜 시리즈가 컴퓨터의 테크닉을 활용하여 제작되었다. 맥콜은 모델이었던 조용필의 인기와 더불어 소비자들의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다. 이렇게 시험적으로 시도되었던 몇편의 광고가 소비자들의 적극적인 반응을 얻게 되자 computer 영상을 이용한 광고는 80년대 후반에 매우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정착되어 갔다.

두번째로 눈에 뜨이는 현상은 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의식한 광고가 상당수 제작되었다는 점이다. 특히 스포츠 용품과 음료 등의 품목에 있어서 올림픽은 자사의 제품을 전세계에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프로스펙스는 "최선을 다할 때 모두가 승리자" 라는 캠페인 광고를 제작했고, 삼성전자는 "아시아인이 몰려온다"라는 헤드라인으로 광고를 만들었다. 이밖에도 "여러분의 오비 맥주가 올림픽과 만났습니다.", "아시아인의 우정의 자리가 될 것을...... 코라콜라의 마음입니다." 등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주제로 한 광고가 다수 제작되었다.

세번째로는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외국인 모델이 한국 TV광고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동안 외국인의 출연은 TV광고 사전심의 기준에 따라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사회 전체의 개방분위기와 국제화 경향에 따라 외국인 모델의 한국 TV출연이 허가되었다. 89년 봄, 홍콩의 액션 배우 주윤발이 거칠게 오토바이를 타고 나타나 "싸랑해요. 밀키스"라고 외침으로써 외국인 모델이 한국 TV광고에 본격적으로 등장하였다. 곧이어 프랑스의 여배우 소피 마르소가 럭키의 드봉화장품에 출연하였고, 홍콩배우 장국영이 오리온의 "투유 초코렛"을 들고 한국 청소년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았다. 그 뒤를 이어 왕조현, 유덕화 등이 한국 TV에 등장하였다.

그러나 갑작스런 외국 모델의 기용은 외화의 낭비와 청소년들의 정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방송광고 심의 위원회 역시 예기치 않았던 청소년들의 열광적 반응과 그러한 현상을 우려하는 사회적 비난에 못 이겨 결국은 외국인 출연 문제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치 일과성의 태풍처럼 외국인 모델은 일년여 남짓 한국의 TV광고에 등장하였다가 다시 출연이 사실상 금지되었다.

3) 신기술의 도입과 모방광고

1980년대부터 1985년에 이르는 기간이 TV의 칼라화에 따른 혼돈과 실험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1986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5년간은 한국의 TV광고가 기술적인 측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촬영이나 조명 등 영상을 만들어 내는 기본적인 분야로부터, 촬영된 영상을 편집하고 다듬는 post production의 분야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테크닉이 매우 빠른 템포로 도입되었다.

끊임없이 개발되는 영상기계와 컴퓨터를 활용한 첨단기술이 영상표현에 관한 한 불가능이 없는 시대로 이끌어갔다. 눈에 보이는 것만이 영상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 떠오르는 느낌이나, 머릿속으로 스쳐지나가는 추상적 이미지까지 구체적으로 형상화시킬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러한 신 기술의 개발과 도입은 TV광고 크리에이터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자극이며 도전이었다. 경쟁적으로 새로운 영상개발에 몰두하게 되었고 표현의 차별화는 곧바로 광고적 차별화로 인식되었다. 특히 이 시기에 제작된 일화의 보리음료인 맥콜이라든가 삼성전자의 기업PR인 휴먼테크 등은 한국 TV광고에 새로운 흐름을 유도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이제까지 한국의 TV광고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맥콜과 휴먼테크의 새로운 발상과 독특한 영상테크닉은 일반 대중으로부터 큰 반응을 얻었다. 그리고 그러한 성공에 자극받아 한국의 많은 티티광고가 테크닉에 의존한 영상개발에 몰두하게 되었고 그 과정 속에서 자연스럽게 외국광고의 테크닉과 아이디어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실험적으로 외국광고의 테크닉과 아이디어를 본뜬 광고를 만들게 되었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듯이 한국의 TV광고 역시 우리보다 앞서 있는 외국 광고들을 모방함으로써 점차로 새로운 기술개발은 외국광고의 모방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1985년경부터 유행하기 시작한 모방광고는 대개 세 가지의 유형으로 나타났다. 첫번째 케이스는 이국 광고를 완벽하게 복제하는 경우이다. 특정한 외국광고를 복사하듯 동일하게 촬영되었을 뿐 아니라 편집의 순서도 똑같이 구성함으로써 모델과 상품만이 달라졌을 뿐 외국 광고와 똑같은 형태로 만드는 광고였다. 심한 경우 카피까지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었다. 두번째의 케이스는 여러 외국광고들로부터 인상적인 장면들을 한두 컷씩 표절하여 그것을 하나의 광고로서 모자이크 하는 경우이다. 내용은 비록 어느 한 광고를 표절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전체적인 분위기나 흐름은 외국 광고의 느낌을 그대로 유지하는 형태의 광고라고 할 수 있다. 세번째의 케이스는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표절하되 그것을 영상적으로 표현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변화를 준 경우이다. 이 경우는 영상을 모방했다기 보다는 아이디어를 표절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있어서 모방광고의 유행을 촉발한 것은 코카콜라의 World wide campaign이었다고 할 수 있다. 코카콜라는 시장진입의 초기에는 현지의 사회적 분위기에 정서에 영합하는 광고를 집행한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장이 확보되고 현지의 정서가 서구적인 표현을 수용할 수 있다고 판단되면 전세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World wide campaign 광고를 현지에 도입하는 전략을 구사해 왔다. 한국의 경우도 상당기간 한국적 정서와 사회분위기에 영합한 광고를 제작해 왔으나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소비자가 서구적 분위기의 광고를 수용하는데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면서 곧바로 서구적 분위기의 코카콜라 광고를 제작하였다. 외국인 모델의 기용문제와 광고시장 개방문제 등 현실적인 조건에 따라 코카콜라는 미국에서 제작된 광고와 유사한 분위기와 내용을 가진 광고를 한국 내에서 제작하였다. 이 경우 당연히 미국에서 제작된 광고가 텍스트의 역할을 해 주었다. 새로운 형태와 새로운 감각을 표현하고 있는 코카콜라의 광고는 즉각적으로 젊은 세대들에게 열광적으로 수용되었다. 코카콜라의 성공은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고 있던 한국 TV광고에 외국광고의 모방이란 유행을 불러 일으켰다.

외국의 성공한 광고를 본따 만든 모방광고는 진부한 소재와 도식적인 표현 패턴에 권태를 느끼고 있던 젊은 소비층에게 강하게 어필되었다. 그리고 대중들의 적극적인 관심과 함께 모방광고는 한국 TV광고 전반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한국의 TV광고가 광고적 주제를 잃고 말초적이며 감각적인 표현쪽으로 경사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모방광고가 유행하게 된 이유가 단순히 젊은 계층의 광고적 기호의 변화와 그런 경향에 편승한 몇몇 크리에이터의 자질에만 문제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어찌보면 필연적이라고 할 수 있는 몇 가지 환경적인 배경이 작용했었던 것이다.

한국에서 모방광고가 등장하게 된 첫번째 이유는 기술적인 환경 변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 종래 흑백광고 시대에 있어서는 새롭게 개발된 표현의 독특한 테크닉이 일정기간 동안 한 개인이나 또는 특정한 제작사에서 배타적으로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러나 칼라시대에 있어서 post production의 개념이 도입됨에 따라 기술적인 Know How를 모든 제작사가 공유하게 되었다. 따라서 표현기술에 관해서 모든 제작사들의 능력이 평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평준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제작사들은 새로운 표현 패턴 개발에 경쟁적으로 몰두하게 되었고 그 모델을 외국의 광고로부터 찾게 되었다.

두번째의 이유는 TV광고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감독들의 성장배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초에 기획과 제작의 분담이라는 형태로 대행사와 제작사의 역할이 정리된 이후에 대부분의 디렉터들은 제작사에서 양성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1985년을 전후로 하여 TV광고 제작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소위 제3세대 그룹으로 분류할 수 있는 이들 젊은 디렉터들은 그 성장과정이 제2세대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대행사 출신들과는 현격한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TV광고를 제작하는데 있어서 대행사 출신 디렉터들이 비교적 마케팅적 사고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다면 제작사에서 성장한 이들 3세대 그룹은 오로지 표현의 테크닉 측면에서만 집중적으로 훈련되었다. 따라서 이들이 제작하는 TV광고의 방향 역시 마케팅 지향적이기 보다는 다분히 영상 중심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영상적인 아이디어는 외국광고를 통해서 찾는 것이 매우 간편했다.

세번째 이유는 Youth Market의 등장이라는 측면에서 검토되어질 수 있다. 교복자율화와 함께 형성되기 시작한 Youth Market은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더욱 확대되었고, 소구능력 또한 증가되었다. 그들이 한국의 소비시장에 새로운 주력 타겟으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새로운 그룹의 성향은 매우 감각적이고 충동적이었다. 따라서 TV광고 역시 무엇인가 참신하고 세련되지 않으면 안 되었다. TV광고에 대한 이들의 감각적 요구와 외국광고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온 모방광고의 분위기는 쉽게 영합되었다. 초기에 시험적으로 시도되었던 몇 편의 모방광고가 Youth Market에서 적극적인 반응을 얻게 되자 유사한 유형의 광고들이 양산되었고, 시간이 갈수록 한국 TV광고의 또 다른 패턴으로 정착되었다.

네번째의 이유는 상품의 무개성화 현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의 중반은 수출도 순조로웠고 내수시장도 활발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활동의 여건이 좋아지게 되자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기술개발에 투자를 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서 경쟁제품 사이의 기술격차가 줄어들게 되었다. 상품의 USP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상품 자체의 차별적인 특징이 없어지게 되자 광고주는 광고 측면에서의 차별화를 강력히 요구하게 되었다. 상품의 무개성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하여 광고의 개성화가 더욱 강조되기 시작한 것이다. 끊임없이 요구되는 새로운 아이디어와 표현 테크닉에 대한 탈출구로써 외국 광고가 텍스트로 활용되었다.

다섯번째 이유는 외국 광고를 복사하여 판매하는 회사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1984년 이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TV광고업계가 접촉할 수 있었던 외국의 광고 자료는 Acc나 Clio의 입상작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4년, 후일 OTTO로 개명한 한국광고연구원이 발족하여 미국, 일본은 물론 영국, 프랑스, 이태리, 독일 등의 TV광고를 수집, 정리하여 그것을 한국의 광고업계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아이디어가 뛰어난 외국광고의 손쉬운 접촉은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 크리에이터들에게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여섯번째 이유는 제작환경의 변화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형광고 대행사가 경쟁적으로 설립되었다. 한정된 국내시장에서 우후죽순 격으로 늘어난 대형 광고 대행사들은 필연적으로 치열한 광고주 유지경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과정에서 대행사들은 소모적인 과당경쟁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TV광고 제작에 있어서도 충분한 제작기일을 광고주로부터 보장 받지 못한 채 작업을 진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 압력은 그대로 TV광고 제작팀으로 전가되었다. 따라서 대행사나 제작사의 크리에이터들은 TV광고 제작을 위한 충분한 연구와 검토를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를 갖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한 현상이 반복됨에 따라 그것은 마치 당연한 일인 것처럼 습관화되었다.

일곱번째 이유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88년의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의 사회는 국제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었다. 많은 광고주 역시 자신들의 기업이나 상품의 이미지가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국제화 되어지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이러한 광고주들의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많은 TV광고들이 서구적인 발상과 분위기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적절한 표본이 외국의 광고였던 것이다.

마지막 여덟번째로 소비자 구매 태도의 변화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다. 1980년대 중반 우리 사회는 정치적인 불안만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낙관적인 분위기였다고 할 수 있다. 경제는 두자리 숫자의 성장을 기록하고 있었고 경색된 정치분위기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민주화의 가능성이 엿보이기 시작했다. 외국 여행도 자유스러워졌으며, 근로자의 소득 또한 상당한 수준으로 개선되고 있었다. 수입이 개방되어 말로만 듣던 외국의 유명상품을 직접 구입할 수 있었고, 물가의 안정에 따라 전체 국민의 구매능력이 향상되었다. 이러한 낙관적 사회분위기는 소비자들의 구매태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종래의 이성적이고 계획적인 구매태도가 충동적으로 바뀌었을 뿐 아니라 상품의 선택에 있어서도 실리적인 것이 아니라 과시적인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소위 과소비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소비자의 구매태도가 바뀌게 됨에 따라 TV광고 또한 제품의 물리적 특징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것보단 상품이 가지고 있는 감정적 가치가 더욱 주요한 표현의 목표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모델은 외국광고의 표현 속에서 손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가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생겨난 모방광고는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존심과 도덕적 수치심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한국 TV광고의 지배적인 경향으로 유행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경향은 광고적으로 충분히 훈련되지 않은 일부의 젊은 크리에이터들에게 잘못된 관행으로 습관화되었다. 그러나 모방광고에 대한 여러 가지 부정적인 관점에도 불구하고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한국의 TV광고는 외국의 광고를 모방함으로서 괄목할만한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방광고의 유행은 한국의 TV광고가 한 단계 발전해 가는 과정 속에서 나타났던 일종의 과도기적 현상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제7절 대중문화로서의 TV광고(1991-1995)

1) 대중문화로서의 TV광고

1991년부터 1995년에 이르는 기간은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변화와 개혁이 있었던 시기였다. 특히 정치적인 변혁은 국민들의 의식과 사회 구조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 5.16 이후 30여년간 군부에 의해 장악되었던 정치권력은 1993년 자유로운 경선을 통하여 평화적으로 교체되었다. 그것은 종래에 있어왔던 정권의 교체와는 본질적으로 의미를 달리하는 것이었다. 비로소 국민들의 자유로운 의지에 따라 선택된 정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일체의 과거 역사는 새로운 기준에 따라 재평가 되었다. 일부는 부정되었고 또 일부는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해석되거나 수정되었다. 여러 가지 구속과 규제가 약화되었고 동시에 새로운 기준에 따른 질서가 생겨나게 되었다.그리고 정권교체의 당연한 결과로써 과거에 기득권을 누려오던 계층에 대한 대대적인 교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금융과 부동산에 대한 실명제가 실시되어 부의 소유개념에 대한 태도를 바꾸지 않을 수 없었으며 대외 무역에 있어서는 국제적인 압력이 더욱 거세어져 한국 또한 WTO 체제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경제 전반에 걸쳐 거의 대부분의 시장이 개방되었고 광고 시장 또한 전면적으로 개방되었다. 미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로 한국의 광고 산업이 본격적인 국제경쟁시대를 맞게 된 것이다. 이러한 개방의 분위기는 문화적인 측면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동안 엄격하게 통제되고 있던 신문, 방송, 출판 등의 신규허가 규제가 완화됨에 따라 대중매체의 양적인 증가가 폭발적으로 이루어졌다.

신문은 증면되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잡지가 창간되었다. 그것은 비단 국내 출판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외국의 잡지를 비롯해서 영상물, 영화, 음반 등이 거의 무제한적으로 수입되었다. 막혔던 봇물이 터지듯 막대한 양의 대중 문화 상품이 한국의 시장에 유입되었다. TV의 경우에도 SBS의 개국에 이어 Cable-TV와 지방 방송의 설립이 빠른 속도로 추진되었다. 정치, 경제적인 변화와 함께 동시적으로 이루어진 문화적 충격은 한국인들의 가치관과 생활태도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특히 감성적으로 예민한 젊은 세대에 있어서 사회 전체의 급진적인 개방 분위기는 그들의 의식 형성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구시대적 사고와 기준으로써는 수용하기 어려운 신사고 세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TV광고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몇가지 서로 다른 방향으로부터 출발하였다. 첫번째의 방향은 한국적 creative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높아졌다는 점이다. 1990년대 초반 1,2년간의 한국 TV광고의 흐름을 결정한 것은 외국광고 모방에 대한 자기 반성이었다. 한국의 TV광고가 외국광고의 모방을 통해서 비록 표현기술과 영상 테크닉 측면에서는 괄목할 만한 향상을 이루기는 했으나 그런 이유로 해서 외국광고의 모방이 정당성을 갖게 되는 것은 아니었다.

크리에이터로서의 자존심과 도덕성의 문제를 떠나서도 모방광고는 광고와 마케팅의 문제라든가, 한국 광고에 대한 사회적인 불신 등의 문제점을 노출하고 있었다. 특히 1992년 미국의 AD-AGE가 지적 보호권의 문제와 연계하여 한국 TV광고의 25%가 외국광고의 모방이라는 기사를 게재함으로써 한국의 광고업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 다소 과장된 부분도 있었으나 비교적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주장이었기 때문에 한국의 TV광고 업계는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한 반성의 결과로써 한국의 시장과 마케팅 조건에 맞는 한국적 creative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검토되었다. 그 구체적인 방법의 하나로서 한국의 TV광고는 기교 중심적인 광고로부터 주제 중심적인 광고로 방향전환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주제는 주로 한국의 정서라든가 한국인의 의식 속에서 추구되었다.

오래 전부터 고향의 맛을 강조하던 "다시다"류의 광고가 다시 주목 받게 되었고 한국적인 인간미를 강조하는 맥심커피의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라든가 젊은 세대의 라이프 스타일을 배경으로 한 삼성 VTR "남자는 여자하기 나름" 등의 광고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1992년에 이르러 효심을 주제로 한 경동 보일러라든가 한국인만의 독특한 정서라고 할 수 있는 칠성사이다 "백두산 시리즈" 그리고 조선무약의 우황청심원 "우리 것이 소중한 것이야" 등으로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