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 Williams의 지배적인 것, 잔여적인 것, 부상적인 것
'통합'되어 버린 '부상적인 것'으로서의 「광수생각」
구희령/연세대학교 대학원 석사 3학기
I. 서론
1. 문제 제기 및 연구 목적
한국에서 종합 일간지의 만화, 흔히 말하는 신문만화는 다른 '만화들'과 다른 위상으로 존재해 왔다. '시사만화'로 통칭되는 이들 신문만화는 형식적인 면에서는 네 컷 짜리와 한 컷 짜리로 일반 만화와 차이점이 있었으며, 특히 내용면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시사만화'라는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이, 스토리나 유머를 중시하는 일반 만화와는 달리 신문만화는 그 날의 신문기사 중 주요 내용 -주로 정치면이나 사회면의 내용- 을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다. 신문의 만화를 보면 그 날의 가장 중요한 뉴스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는 말이 있을 만큼, 날카로운 풍자와 비판이 신문만화의 주요한 특징이었다.
그런데, 신문에 기존에 없었던 제3의 만화양식이 나타났다. 일반 만화잡지나 사보 등 '잡지'에서나 볼 수 있던, 여러 컷으로 나누어진 만화가 등장한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컷수는 자유로 하고 만화 전체의 크기가 정해진 독특한 형태의 만화가 신문에 등장하였다. 1997년 4월 4일, 조선일보에 연재되기 시작한 박광수의 「광수 생각」은 기존의 '시사' 신문만화와는 확연히 다르다.
「광수생각」은 그 크기부터가 한 컷 짜리 만화의 4배에 가깝다. 컷수도 고정되어 있지 않고, 한 컷에서부터 무려 열 여섯 컷에 이르기까지 그날그날 다양하다. 제한된 크기 때문에 그 전의 신문만화들은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던 과감한 컷 나누기이다. 그림체조차 기존의 신문만화들과는 판이하다. 로트링 펜으로 윤곽을 그리고 컬러를 입히는 방식과 둥글고 단순하지만 모양새가 깔끔한 선은 만화라기 보다는 일러스트레이션의 그림체에 가깝다.
내용을 살펴보면 「광수생각」과 다른 시사 만화들의 차이가 더욱 뚜렷해진다. 기존 한 컷 짜리와 네 컷 짜리 만화의 경우는 비록 한 컷과 네 컷으로 형식은 서로 다르지만, 그날의 정치면과 사회면의 주요기사를 만화로 요약하며, 약간의 '풍자'를 곁들이는 방식으로 전개되는 만화 내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광수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광수생각」을 보고 그날 신문의 주요기사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다. 즉, 만화와 신문기사가 어느 정도 독립되어 있는 것이다. 일반 연재만화와는 달리 그날그날 내용이 독립되어 있다 -다음날로 스토리가 이어지지 않는다- 는 점에서는 「광수생각」도 다른 신문만화와 그 맥을 같이 하지만, 기사와는 별개로 만화 자체가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점에서 다른 신문만화들과 크게 다르다.
또한, 그날의 사건을 풍자를 곁들여 단순 나열하는 기존 신문만화와는 달리(이것은 한 컷과 네 컷이라는 형식상의 제약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갖게 되는 특성이다. ) 「광수 생각」은 신문만화가 아닌 일반 만화처럼 '스토리 라인'이 있다 하나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다. 이는 글씨와 그림을 넓은 공간 속에서 필요한 만큼 채워 넣을 수 있는 그 형식적 특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스토리의 대부분은 '썰렁한 개그'로 채워진다. 「광수생각」의 내용상의 특징은 마치 명랑만화를 떠올리게 하는 듯한 '우스개 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스토리를 가진 우스개 소리 -그것도 신문의 기사와는 관계없는- 라고 하는 것은 기존의 '신문만화=시사만화'라는 관념을 완전히 뛰어넘는 것이다.
'일반 만화'와 같은 관점으로 보면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광수생각」의 이러한 형식적·내용적 특징이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은, 이것이 신문, 그것도 스포츠 신문이 아닌 대표적인 종합 일간지의 하나인 <조선일보>에 게재된다는 사실이다. 일반 만화와는 다른 '시사만화'만이 실리던 종합 일간지에 기존의 틀을 깨고 '일반 만화'의 형태에 가까우면서, 연재 형식이 아니라 매일 독립된 이야기라는 형태로 「광수생각」이라는 제3의 신문 만화가 등장했다는 사실은 상당히 흥미로운 일이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시사만화'와는 다른 가벼운 정서와 색채의 「광수생각」이 종합 일간지, 그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으로 꼽히는 <조선일보>에 등장하여 인기를 얻으면서 계속 연재가 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2. 지배적인 것, 잔여적인 것, 그리고 부상적인 것
하나의 문화적 과정은 확정적이고 지배적인 면모를 지닌 하나의 문화적 체계로 간주된다. 1) 하나의 지배적인 체계는 전반적인 문화 과정에 걸쳐 상호 작용을 일으킨다. 레이몬드 윌리엄즈는 이러한 지배적인 체계를 이해하는데 빼놓아서는 안될 것으로 '잔여적인 것'과 '부상적인 것'을 들고 있다.
'잔여적인 것'은 과거에 그 효과적 형성을 보았으면서도 문화적 과정 속에서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2) 즉, 과거의 지배적 체계로서 현재의 지배의 체계 속에서 현존 하나, 예전과는 다른 역할과 의미를 지니고 있는 체계를 말한다.
'부상적힌 것'은 지속적으로 창출되고 있는 새로운 의미 체계, 가치관 및 관례 그리고 새로운 관계 및 새로운 유의 관계이다. 3) 어떠한 실제 사회의 구조 속에도 -특히 그 계급 구조 속에- 지배적인 요소들에 대해 대안적이거나 반대적 성질을 지닌 문화적과 정의 요소들에 대한 사회적 토대가 항상 존재한다. 하나의 새로운 계급이 형성되고 그 계급이 의식화되는 가운데 실제적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문화적 형성물을 이루는 요소들이 부상한다는 것이다. 4) 헤게모니의 개념을 적용하여, 지배적인 것과 잔여적인 것, 부상적인 것을 거칠게 정리해 본다면, 지배적인 것은 현존하고 있는 헤게모니로, 잔여적인 것은 과거의 혜게모니가 잔여해 있는 형태로, 부상적인 것은 앞으로 헤게모니를 잡을 수 있을 지 모를 가능성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3. 부상적인 것의 통합
새로운 문화적 형태가 부상하면 할수록, 그리고 특히 그것이 대안적이기보다는 반대적인 성향을 띠면 띨수록, 통합 작용이 점점 본격적으로 시도되기 시작한다. 즉, 부상하는 것을 새로운 '지배적인 것'으로 만들지 않기 위하여, 기존의 '지배적인 것'이 지배질서 속으로 '부상하는 것'을 편입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일 정도로 대안적, 반대적 성향을 띠는 계급적 요소들 -즉, 노동조합, 노동계급 정당, 노동계급 생활양식 등- 에 대해서는 가장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통합이 시도된다. 그러한 여건 속에서의 부상 작용은, 그래서, 실제적 통합의 한 국면을 넘어서려는 끊임없이 되풀이되고 항상 반복 가능한 움직임이다. 5) 지배적 형식들과 이것들의 사회형식적 관계들을 초극(超克)하려 시도하는 새로운 작업은 언제나 있는 법이라고 윌리엄스는 말한다. 그러나, 동시에 '가끔' 초극에 성공한다고 말함으로써6), '대부분'의 경우는 '통합' 되어 버린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즉, 새로운 '부상적인 것'은 '지배적인 것'을 초극하여 '새로운' 지배적인 것이 되려 하지만, 대개의 경우 '지배적인 것'의 '새로운 한 국면'으로 통합되어 버린다. 이 경우 대부관의 통합이 그 움직임에 대한 인정이나 시인, 따라서 어떤 형태의 용납과 같아 보인다는 사실 때문에 이것을 통합이 아닌 새로운 헤게모니의 획득으로 오인할 소지도 있다. 이런 복잡한 과정 속에서 통합에 대한 항거의 형태로서의 극소적 잔여물과 일반적 부상물 사이에 상당한 혼란이 사실상 일어난다. 7) 이러한 잔여물들 때문에 '부상적인 것'이 '헤게모니'를 잡게 된 것으로 오인할 수 있으나, 큰 맥락 상에서 보면 이러한 잔여물들은 '지배적인 것'의 '양보'로 나타난 것이며, 체재 내에 통합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한 부분들이다. 따라서, 이것을 헤게모니의 이동으로 오인해서는 안되며, 통합 과정의 일부로 파악해야 한다.
4.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틀거리로 바라보는 「광수생각」
1997년 4월 4일 금요일부터 <조선일보>에 게재되기 시작한 박광수의 만화 「광수생각」은 '신세대'라고 통칭되는 새로운 집단의 문화적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세대라고 표현되는 이들은, 책이 아닌 만화를 본다는 사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죄의식을 갖지 않는 이른바 '만화세대'이며, 다양한 직업을 가진 세대이며, 컬러 텔레비전 세대이고, 한글 세대이며, 탈이데올로기적이고, '가벼운' 감성을 가지고 있다. 「광수 생각」은 이러한 세대들이 열광하는 만화이며, 이들 집단의 문화적 부산물로 볼 수 있다.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지배적인 것, 부상적인 것, 잔여적인 것은 경제적 토대에 기반을 둔 '계급' 구조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광수생각」이라는 문화적 산물을 배출한 '신세대' 집단은 그 계급성을 밝히기가 모호하다. 그러나, 계급의 개념을 보다 폭넓게 받아들여서 어떠한 공통 분모를 가진 집단 -예를 들어 신세대의 경우는 위에서 지적한 만화세대, 다작업 세대, 컬러 텔레비전 세대 등- 으로 이해한다면, 「광수생각」을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틀거리로 바라보는 것에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사회의 지배적 문화 산물'로서 <조선일보>를, '부상적인 것'으로서 「광수생각」을 설정하고 지배적인 것이 부상적인 것을 통합해 나가는 과정으로 「광수생각」이 < 조선일보>에 연재되고 자리를 잡는 과정을 설명해 보고자 한다. 「광수생각」을 '부상적 인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본문에서 보다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5. 연구방법
이 글은 「광수생각」이 처음 연재된 1997년 4월 4일서부터 1998년 3월 31일까지 약 1년간 게재된 연재 분량 전체를 분석대상으로 한다. 부상적인 것의 통합과정을 보기 위해서는 시기적으로 떨어진 일정 기간 단위로 조사하는 것보다 연재 초기에서부터 연속적으로 전집 조사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사전 조사를 한 결과, 1998년 1월부터는 「광수생각」의 게재 형태나 내용이 완전히 정착되어 통합이 완료된 것으로 판단, 1998년 3월 31일 이후 게재분의 분석은 그다지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실시하지 않았다.
분석 방법으로는 내용 분석을 택하였다. 먼저 게재 형태상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 지를 살펴보았다. 몇 면에 실리는지, 1주일에 몇 회나 실리는지, 컬러인지 흑백인지 등을 살펴보았다.
내용적으로는 각 주제별로 다음의 항목으로 나누어 분류하였다. 단지 우스개 소리 외에는 다른 어떤 의미도 들어가 있지 않은, 상식을 뒤집는 듯한 내용 <예)오늘날 구미호는 간을 섭취하기 위해서 돈을 모아 포장마차에서 순대와 간을 사먹는다는 1997년 5월 5일자>을 '상식 뒤집기'로, 아버지, 어머니, 자식, 아내, 형제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한 내용을 모두 묶어서 '가족사랑'으로, 장애인을 돕자, 자선을 하자, 애국심을 키우자 등의 내용을 모두 묶어서 '계몽'으로, 인생의 진리를 설파하는 내용을 '좋은 말' 로 <예) 피에르 카르댕의 일화를 그리며, '인생은 도박과 같다. 하지만 도박은 성실함을 이길 수 없다'라는 '광수생각'을 덧붙인 1997년 5월 1일자>, '누구'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일반적인 사랑을 말한 내용은 '사랑'으로 <예) '가슴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단어가 있습니다.' '사랑'이라는 '광수생각'을 덧붙인 1997년 11월 14일자>, 비록 그 날짜의 신문 기사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 비교적 그 즈음에 논의되던 사안과 내용이 일치하는 경우에는 '시사'로 분류하였다. 이외 「광수생각」에서 지속적으로 보이는 '청소년/교육' 문제, '음주운전', '외모', '반금(反金)', '그리움' 등을 별도의 항목으로 처리하였다. 나머지 산발적인 주제들은 '기타'로 처리하였다. 다만, 전체 스토리와 끝부분의 '광수생각' 부분이 서로 다른 내용일 경우 -뒤로 갈수록 이런 경우가 많아 진다- 에는, 단순히 재미를 주기 위한 스토리에 비해 막판 뒤집기와 같은 효과를 내는 '광수생각' 쪽에 비중을 두는 쪽이 바람직하다고 판단하여 '광수생각' 쪽에 맞추어 내용을 분류하였다. 예를 들어, 1998년 1월 9일자는 결혼 20주년 여행을 호주로 가고, 30주년에는 호주로 가서 20주년에 버려두고 온 아내를 찾아오겠다는 내용으로 '황당한' 우스개, 혹은 아내에 대한 반발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광수생각'은 '일년에 한번쯤은 집사람을 위해 여행을 가십시오.'로 끝을 맺고 있기 때문에, 아내에 대한 '사랑'으로 분류하여 '가족사랑' 항목에 포함시켰다.
또한, 기존 시사만화와의 비교를 위해서 <조선일보>에 연재되는 일반 시사만화인 「조선만평」(한 컷짜리), 「독볼장군」(네 컷짜리), 「Mr.삐삐」(네 컷짜리)를 조사기간 동안 함께 살펴보았다.
한편, 필자인 박광수나, <조선일보>의 편집진을 직접 인터뷰 할 수 없었으므로, 뒷 이야기를 살펴보기 위해 「광수생각」에 관한 단행본 두 권을 이용하였다.
다음 페이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