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한국 방송제작과정의 문제
지금까지 방송상품의 특성이 제작현장에서 어떠한 형태로 나타나고 또 어떠한 변화를 유도하는지 검토해 보았다. 이 분석에서 얻을 수 있는 시사점은 방송은 일반 제조업제품과는 다른 특성, 즉 하이테크제품, 지식상품으로서의 특성을 가지므로 그 특성을 파악하는 것이 생산자로서의 기본자질이라는 점이다. 또한 방송상품의 특성과 그것에서 비롯되는 제작현장의 변화방향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이 방향성에 비추어볼 때 현재 한국 방송제작의 문제점은 어떤 것이고 어떠한 개선책이 필요한지 논의해 보고자 한다.
1. 제작 시스템의 문제
우선 제작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할 수 있겠다. 프로듀서와 연출자가 분리되어 있지 않은 상태에서 PD가 기획, 예산, 연출을 모두 맡아 하다 보니 전문적인 기획과 연출 능력이 개발되기 어렵다. 연출자(Director)의 작업을 도우며 충실히 도제수업을 받아야 할 AD(Assistant Director)가 연출을 돕는 것이 아니라 프로듀서의 역할을 하며 제작비 신청과 수령, 집행, 정산 등을 주업무로 하고 있다. 이 방식을 개선하기 위해 CP제도를 도입했지만 AD가 영수증 처리문제로 고심하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한 명의 CP가 여러 개의 프로그램과 그에 따른 PD들을 관리하도록 되어 있는 CP제도는 원래 연공서열식의 인사구조를 개선하기 위한 방안으로 도입된 것이다. 즉, 직급에 관계없이 관리자가 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팀제이다. 그러나 현재의 제도에서는 CP에게 예산운용권과 인사권이 주어지지 않아 책임관리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있다. CP는 주어진 인력과 예산을 가지고 수동적으로 관리만 할 뿐 과거 부서제의 부서장과 달라진 것이 없다. 프로듀서에게 일체의 권한을 주어 본인이 확보한 예산 내에서 스튜디오, 방송설비, 인력 등을 책임지고 선택하게 하는 영국 BBC의 '프로듀서 책임제'(Producer's Choice)를 참조할 만하다.
2. 기획과정의 문제
제작단계의 하나인 기획27)과정은 과거에는 아이디어 제시단계나 제작기획서 작성의 단계까지만을 의미했지만 보다 경쟁력있는 프로그램 제작에는 사전제작이 결정적이라는 사실이 점차 널리 인식되어 가고 있다. 하이테크놀로지 제품의 R&D단계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수확체증의 세계에서 R&D의 중요성은 앞서 논의한 바와 같다. 사전제작단계에서의 철저한 준비와 현실적 계획은 프로그램 성공의 결정적 요소이다. 제작의 3단계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기획 단계이고 그 중에서도 사전제작단계가 프로그램의 성패를 결정짓는다. 사전제작단계가 철저하지 못하면 제작비와 시간의 막대한 손실을 가져와 좋은 프로그램을 만들 수 없다. 예를 들어 길거리 장면을 촬영할 때는 촬영지 섭외와 경찰 등 관계자 협조요청 등이 이루어져야 하고 악천후 등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해 촬영이 불가능할 경우를 대비해 지체없이 곧바로 다른 작업으로 선회 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해 두어야 한다. 한국 방송 프로그램의 질이 문제가 되는 이유로 자주 지적되는 것은 기획에서 제작에 이르는 시간이 짧다는 사실이다.28) 드라마 등 시리즈물의 경우 전편을 전부 제작한 뒤 방송해야 한다는 지적을 계속 받고 있으나 실제로 시리즈물이 방송되는 도중 다음 회를 제작하기에 급급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같은 예산이라도 사전제작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질낮은 프로그램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다.
3. 제작의 개방화 문제
현재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방송사 내부의 인력과 장비를 이용하여 제작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프로그램간 경쟁이 치열하지 않아 타성에 빠질 우려가 있다. 프로듀서 또는 연출자가 제작 크루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내에서 주어진 인력배치와 스튜디오, 부조정실 스케줄에 맞추다 보니 연출자에게 필수적인 강력한 지휘권이 주어지지 않는다. 직급이 낮은 연출자는 직급이 높은 기술감독이나 카메라맨들에게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없을 뿐 만 아니라 모든 크루에게 작업동기가 강하게 부여되지 않아 연출자가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프로듀서가 사내외를 막론하고 예산 범위 내에서 설비와 인력을 선정해 활용할 수 있어야 하겠다. 이러한 방식으로 제작에서 이른바 '아웃소싱'(outsourcing)이 이루어지면 당연히 프로그램의 경쟁력은 높아질 것이다. 아웃소싱은 이에 더하여 방송국 경영상의 효율성을 가져와 보다 많은 재원과 시간이 프로그램 제작에 투입될 수 있을 것이다.
4. 전문인력의 확충 문제
이는 제작자의 자질에 관한 문제로서 현재 방송사는 대부분의 주요 제작인력을 신입공채를 통하여 확보하고 있다. 신입사원이 독자적인 제작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수년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더구나 영어, 상식, 논술 등 필기시험을 위주로 선발된 사원이 재능이 부족한 것으로 판명되어도 정규직원이기 때문에 자질이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정년에 이르기까지 활용해야 한다. 물론 신입공채를 통한 인력확충은 직종 내의 단결을 도모하고 프로그램 내용에 대한 정치적 압력에 대항하는 힘을 길러낸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그 역기능으로 능력있는 타사 출신의 유입을 막아 자체 인력운영의 효율성은 저하되고 경쟁을 통한 프로그램의 질을 제고시킬 수 없었다. 앞으로 중앙 방송사는 가급적 신입직원을 선발하지 않고 유능한 경력직원을 스카우트하거나 계약을 통해 활용함으로써 방송의 질을 높여 나가야 할 것이다. 이는 교육현장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항으로, 대학의 언론학과에서는 서구와 같이 실무교육을 강화해 졸업 후 바로 제작현장에 투입할 수 있는 인적 자원을 배출해야 할 것 이다. 언론학과 출신은 재학 때의 작품을 평가받아 지방 방송국이나 소규모 프로덕션에서 출발한 뒤 능력에 따라 중앙 방송사나 보다 큰 프로덕션으로 진출해 나가는 방식으로 전문능력을 키워 나가야 하겠다.
5. 경영인의 자질 문제
수확체증의 세계에서는 소비자의 욕구와 유통 채널, 그리고 경쟁제품을 이해하는 대량생산 시대의 전략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자기부정과 자기강화의 피드백, 즉 수확체감과 수확체증의 쌍방 메커니즘을 철저히 이해해야 한다. 또한 자신이 속한 생태계, 즉 네트워크로 이루어지는 세계의 방송시장 특성을 철저히 파악해야 한다. 또한 수확체증의 세계는 일종의 카지노에 비유된다. 성공한 상품(또는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어느 선에 이르면 과감히 버리고 새로운게임(또는 프로그램)에 뛰어드는 것이 필수적이다. 즉, 물질적 자원도 중요하지만 용기와 결단력, 의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간 한국 지상파 방송사의 경영인은 대부분 전문적 경영자질보다는 정치적 충성도에 의하여 임명되어 왔다는 평가를 받는다. 방송사의 기자 출신, PD 출신, 또는 방송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없는 신문사 출신, 정치인 출신이라고 해서 반드시 경영능력이 부족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영 진은 하이테크산업에 대한 이해는 접어두고라도 대량생산산업에 대한 이해조차 부족하다고 평가받아온 것이 사실이다.29) 이제 한국방송도 소위 전문경영인을 영입하는 문제를 전향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6. 관료구조의 문제
국내외를 막론하고 공영방송은 관료조직의 특성을 가진다.30) 관료제(bureaucracy)는 조직원의 윤리규범이 바로 설정되고 수행된다면 명확한 업무분장과 규격화된 작업과정으로 일정수준의 결과가 지속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업무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형식에 치우치는 무사안일에 빠지기 쉽다. 한국방송은 역사적으로 공영성이 강조되어 왔다. KBS는 물론이고 공영과 민영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는 MBC와 민영방송인 SBS 모두가 공영방송 이념의 테두리 안에 들어가 있다. 한국의 공영방송은 정권의 개입정도가 크다는 점에서 사실 국영방송적 성격을 띠고 있다. 이에 따라 조직 구조는 관료제적 특성이 강하게 뿌리 박히게 되었다.
관료제적 특성은 전 분야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제작 측면에서만 살펴본다면 예를 들어, 제작기획서 기안, 예산 지출, 출장 품의 등에서 5∼6단계의 결재선을 거쳐야 할 정도로 결정과정이 경직돼 있다. 제작기획 과정상에서도 하의상달(下意上達)이 아닌 상의하달(上意下達)이 일반화되어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기본적인 제작기획은 프로듀서가 아이디어를 내서 편성부서 등 관련부서와 협의과정을 거친 후 최종 결재권자의 결재를 얻어 실행에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한국 방송에서 새 프로그램이 이렇게 시작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개편 때가 되면 편성부서가 중심이 되어 편성안과 프로그램안을 만들어 결재를 받은 뒤 PD들에게 프로그램을 배당해 제작기획서를 제작하도록 하는 형식을 취한다. 끊임없이 형식과 소재를 개발해 현실에 적용해야 하는 지식산업에서 이 같은 경직성은 프로그램 저질화의 근원이 된다.
7. 방송제도의 문제
이 글은 주로 방송의 환경적 요인보다는 상품자체에서 유도되는 생산적 측면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나 한국 방송을 설명하는 변수는 내부보다는 외부적 요인이 더 큰 것이 사실이다. 우선 최소한의 투자로 최대한의 이익을 얻어야 하는 상업방송사에게 시간과 노력을 더 기울여 질높고 시청률도 높은 프로그램을 만들라는 주문은 지나친 것이다. 내용규제를 통해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프로그램은 제약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질낮은 프로그램'을 제약할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한편으로는, 선정적 프로그램을 제한한다는 취지로 내용에 대한 규제가 이루어지다 보면 제작자의 창조성을 제약해 선정적 프로그램은 없어질지 몰라도 '질낮은 프로그램'은 더욱 양산될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상태에 서 상업 방송은 끝없는 지탄의 대상이 될수밖에 없다. 아무런 법적 제재의 근거도 없이 윤리적 지탄만을 계속한다면 방송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관념만을 고착시킬뿐이다.
오히려 문제는 상업방송이 아니라 공영방송이다. 공영방송의 주수입원이 광고로 되어 있는 현실에서 시청률을 의식한 질낮은 프로그램 제작은 불가피한 현상이다.31) 공영방송의 주수입원이 광고가 아니도록 재원조달 방식을 개선하거나 광고방식을 개선하여37) 공영성을 더욱 강화하여야 하겠다. 공영방송의 제작진이 시청률을 의식하지 않고 제작을 하게 된다면 프로그램의 질은 저절로 올라갈 것이다. 이렇게 제고된 프로그램의 질은 간접적으로 민영방송의 질을 향상시키는 효과를 낳게 될 것이다. 민영방송에 대해서는 오히려 규제를 풀어서 창의력을 더욱 고취시키는 방향이 바람직하다. 큐란(Curran)이 제시한 일종의 방송제도의 절충형 모델38) 에서처럼 전문인 채널(professional channel)을 운영하여 이곳에서 다양한 실험이 이루어진 후 이 결과가 다른 방송에 확산되어 전반적인 방송의 질을 제고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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