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수확체증 상품으로서의 방송
그동안 경제학적 시각에서 재화로서의 방송을 파악하고자 하는 여러 연구들은 이를 공공재 또는 비순수 공공재로 분류하여 그에 따른 이론적, 또는 정책적 합의를 도출해왔다.5) 방송의 공공성에 대한 경제학적 설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이같은 접근법은 특히 규범적 시각에서 접근해왔던 방송규제나 정책수립에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제 정책적 차원에서 한단계 내려와 방송공급자의 측면에 서도 경제학적 시각에서 방송재화의 특성을 파악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방송이라는 재화를 공공재 또는 비순수 공공재로 파악하는 방식은 정책입안자들에게 유용한 시각을 제공해 주지만 한편으로는 방송재화를 생산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생산하는 상품의 특성을 설명하고 이해하도록 하는 또 다른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른바 하이테크산업이나 지식산업의 확장을 주목하며 경제학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장하는 브라이언 아더(Brian Arthur)의 논의6)는 생산자의 측면에서 방송재화의 특성을 파악하고자 하는 욕구에도 유용한 시각을 제공한다.
아더의 이론은 수확체감(decreasing-returns)의 이론, 즉 생산이 늘어날수록 수확이 체감한다는 전통적인 경제학 이론이 점차 힘을 잃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에 따르면 수확체감의 이론은 대량생산경제 시대, 즉 전통적 경제학의 대부 마샬(Alfred Marshall)이 살았던 19세기말의 상황에서 도출된 것으로서 광석, 염료, 선철, 석탄, 화학제품 등 천연자원에만 주로 의존해 생산 노하우인 지식과 정보는 중시하지 않던 제조업 시대에 적용된다. 수확체감의 법칙에 따라 시장에서 성공한 어떠한 제품이나 기업도 종국에 가서는 성장의 한계에 도달하여 한정된 틀 안에서 가격과 시장점유율은 안정을 찾게 된다는 것이고 이는 곧 시장에 대한 예측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확체감의 세계는 예측이 가능한 세계로서 반복적인 생산과 지속적인 품질개선을 위해 과학적 관리와 안정된 생산과 조직구조를 요구한다.
이에 반해 현대경제는 수확체증(increasing-returns)의 이론이 적용되는 세계이다. 세계경제는 점차 원료의 대량생산에서 고도화된 기술의 사용으로, 자원의 가공에서 정보의 가공으로, 자연 에너지의 응용에서 아이디어의 응용으로 이동해 가면서 시장 메커니즘도 점점 더 '수확체감'에서 '수확체증'으로 변화해가고 있다. 수확체증이란 일단 시장에서 성공한 제품이나 기업은 계속해서 발전하는 반면 한번 실패한 것은 계속해서 불리하다는 점이다. 수확체증은 특정 분야에서 성공한 제품은 더욱 그 사업이 번창하고 일단 타격을 입은 자는 갈수록 더욱 허약하게 만드는 이른바 '포지티브 피드백'(positive feedback)이라는 메커니즘이다.7) 시장에서 경쟁을 하고 있는 제품이나 기업이 우연한 행운이나 우수한 전략에 의해서 일단 시장지배에 성공하면 수확체증의 메커니즘에 따라 그 우위성은 더욱 확대된다. 전통적 경제이론에서는 수확체증의 산업을 특이한 경제형태로 규정하고 시장질서를 해친다는 이유로 정부규제 대상으로 삼아왔다.8)
그러나 현시점에서 수확체증의 산업은 특이한 경제형태가 아니라 주도적인 산업형태가 되어 가고 있다. 수확체증의 세계는 수확체감의 세계와는 다른 경제원리를 갖고 있고 산업행동의 행태나 문화도 다르다. 그러므로 과거에 적용되어 왔던 방식과는 다른 경영기술과 전략을 요구한다. 이미 컴퓨터 하드웨어 분야에서 IBM이 매킨토시를 제치고,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넷스케이프(Netscape)가 인터넷통신 프로그램 시장을 석권한 것 등 무수한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방송 분야에서도 이같은 현상은 두드러져 왔고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따라 더욱 강화되고 있다. 1970년대 시작된 일본의 소니(SONY)와 파나소닉(PANASONIC)간의 전쟁은 가정용 비디오에서는 파나소닉의 VHS방식이 소니의 베타(BETA)방식을, 방송용 비디오에서는 거꾸로 베타방식이 VHS방식을 누르고 각각 완승으로 결말이 났다.9) 가격이나 기술면에서 큰 차이가 없었지만 우연한 기회의 선점은 포지티브 피드백 현상을 보이며 시장에 대한 석권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자신이 정한 방송기술의 표준이 세계적으로 통용되도록 하기 위해 선진국들은 치열한 싸움을 벌여 왔다. 컬러비디오 시스템방식을 보면, 미국에서 개발된 NTSC방식은 한국과 일본, 그리고 남아메리카 등에서 표준기술방식으로 채택되고 있다. 독일에서 발명한 PAL방식은 영국과 일부 유럽국가에서, 프랑스에서 개발한 SECAM방식은 유럽의 일부 국가들과 러시아에서 사용한다. 자기 나라와 같은 방식을 쓰는 나라와는 방송 프로그램은 물론 방송기자재와 수상기까지도 수출과 수입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술방식을 정하는 것은 국가 정책적 차원의 문제가 된다. 표준방식 채택을 둘러싼 국가간 경쟁의 대표적 사례는 HDTV(고선명TV)방식을 둘러싼 것이다. 1960년대 일본은 HDTV를 개발하기 시작해 1991년부터 위성방송을 통한 아날로그 HDTV방송을 시작했다. 그러나 수상기 값이 일반TV의 12배에 이르러 상용화는 아직 이른 시점이었다. 미국은 앞서 발전하고 있는 일본을 따라잡기 위해 1988년에야 HDTV 개발 정쟁에 뛰어들었고 유럽국가들도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결국 후발주자인 미국은 1996년도에 아날로그가 아닌 디지털방식의 표준을 정했고 결국 일본도 이 방식에 따르기로 정책을 정했다. 방송기술 기준을 놓고 맞붙은 일본과 미국의 싸움에서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는 기술방식의 변화가 미국에 손을 들어 준 것이다.
방송기술의 측면뿐만 아니라 내용의 측면에서도 수확체증의 법칙은 적용된다. 방송물 시청은 소비의 외부성이 나타난다. 많은 사람들이 시청하는 프로그램은 더욱 더 새로운 시청자를 흡입하기 때문이고10) 한편으로는 한 번 길들여진 시청습관을 바꾸기 어렵기 때문이다.11) 심지어는 앞프로그램 시청이 뒤프로그램 시청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12) 또한 케이블TV 등 뉴미디어형 방송은 소비의 정적 외부성이 강조된다.l3) 많은 시청자들이 케이블TV 프로그램을 시청해야 광고가 늘어나게 되고 이는 다시 제작비로 환원되어 프로그램의 질이 높아진 뒤, 또다시 더 많은 시청자를 끌어들이게 되는 선순환 모형을 갖게 되는 것이다.14) 개별 프로그램이나 채널이 아니라 케이블TV 등 개별 뉴미디어산업 전체를 볼 때도 초기 가입자 확보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시장선점을 통한 포지티브 피드백 효과 때문이다.
이같이 하이테크산업, 또는 지식산업에서 수확체증의 법칙이 작용하는 것을 아더의 논의를 빌어 방송산업에 적용해서 검토해 보자면 아래와 같은 3가지 이유에서 비롯된다.15)
① 선행투자비용(up-front costs) : 하이테크제품은 설계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제품의 시장출하에 많은 시간이 소용된다. 하이테크제품은 기술의 노하우에 대한 의존도는 높은 반면 물질적 자원에 대한 의존도는 낮다. 따라서 하이테크제품들은 일반적으로 단위생산비용에 비해 연구개발(R&D)비용이 높게 나타난다. 뒤에서 보다 자세히 논의되겠지만, 방송 프로그램도 기획단계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는 상품이다. 최근 방송제작에 있어서 실제 제작보다는 기획이 방송 프로그램의 성패를 좌우하고 있다. 또한 일단 성공한 제품은 간단한 복사로 수없이 팔려나갈 수 있다.16)
② 네트워크 효과(network effect) : 위에서 잠시 언급했듯이 하이테크제품들은 사용자 네트워크와 연결되어야 한다. 따가서 한번 연결된 네트워크는 방송기술의 측면이나 프로그램 측면에서 우위성을 획득하게 된 것에 대해 더욱 큰 우위를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소비의 정적 외부성, 즉 네트워크 접속비용이 점차 낮아지는 현상과 함께, 뒤이어 개발되는 관련 제품들이 앞서 개발된 제품과 호환 가능하도록 설계·제작되어 다시금 앞선 제품이 힘을 얻게 되는 현상이 네트워크 효과이다. 방송상품은 컴퓨터 소프트웨어와 같이 네트워크로 연결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공중파는 지상파 네트워크를, 케이블TV와 위성은 각각 케이블과 위성망(SCN : Space Cable Network)을 이용하거나 상호 연결된다.
③ 고객의 습관(customer groove-in) : 아더의 분석에 따르면, 하이테크제품들은 훈련을 통해 어떤 제품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사람들은 다시 많은 시간을 들여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다른 제품을 사용하려고 하지 않는다. 방송상품도 습관이 형성된다는 점에서 이와 같다. 시청자들은 한번 보기 시작한 프로그램은 그 프로그램의 질적 우수성 여부와는 관계없이 다음 번에도 계속해서 보게 된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이에 더하여 시청자들은 채널 내에서 앞선 프로그램을 시청하면 뒤이어 나오는 프로그램도 계속 시청하는 행동유형을 보이고 있다. 결과적으로 시장을 선점해서 고객들과 접촉된 제품의 성공확률은 커질 수밖에 없다.
지식주도형 상품으로서의 방송은 대량생산세계에서 요구되는 경영방식이나 문화가 다르게 나타난다. 대량생산경제에서는 대체로 일련의 표준된 가격이 설정되고 반복되는 경향이 있지만 지식주도형 상품은 승자에게만 시장의 지배가 허용되므로 사업자의 관심은 시장선점의 승자가 되는데 있다. 경영이란 차기 기술의 승자가 되기 위한 지속적인 탐색이다. 지식주도형 세계에서 경영자의 목표는 "'다음 번의 대히트작'을 찾는 것"17)이다. 따라서 경영형태는 자연히 생산지향적이 아니라 미션지향적이 되고 조직의 계층도 줄어들어 수평화되는 것이다.18) 수평조직 구조, 미션지향적 경영, 전략적 유연성, 시장 포지셔닝, 리인킨션, 리스트럭쳐링, 리포지셔닝 등 새롭게 등장해 유행하는 경영 스타일은 바로 방송상품 등 지식주도형 산업의 특성에서 비롯된 전략들이다.
지식상품, 하이테크상품, 즉 수확체증의 상품으로서의 방송은 실제로 아래에 서 논의되는 바와 같이 제작방식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즉,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방송제작의 변화양상은 아더가 설명하는 바와 같은 전형적인 지식상품의 모습을 띠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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