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에이티브 가이드 ㅣ 광고의 발상에서 표현까지 ⑥ - 최종회

어느 아트 디렉터의 實戰 메모장

일본에서 뛰게 될 야구선수 이승엽이 사용하고 있는 독특한 방망이에 대해 일본 언론들이 ‘비밀 병기론’을 거론하며 집중 분석에 나서고 있다고 합니다. 역대 일본의 어느 선수도 쓰지 않은 초슬림형 그립의 방망이로 무장하고 일본 홈런왕을 노리고 있다며 일본 특유의(?)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것입니다. 이승엽 선수가 한 시즌 최다홈런 아 시아신기록인 56홈런을 때릴 수 있었던 비결은 일본 선수들의 평균치인 2.5 ㎝보다 짧은 2.25 ㎝의 초슬림형 그립의 방망이를 이용한 빠른 헤드스피드에서 비롯됐다는 것이 일본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한국에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던 방망이에 대한 정밀 분석은 정교한 일본 프로야구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홈런을 많이 치기 위해서는 이론적인 분석 능력보다 실전 능력이 훨씬 중요합니다. 아무리 이론에 대해 정통해도, 아무런 훈련이나 실전 경험이 없는 선수에게는 이승엽 선수의 초슬림형 그립의 방망이를 주어도 무용지물이 될 테니까요. 그 동안 ‘광고의 발상에서 표현까지’를 주제로, 20년 넘게 광고 제작현장에서 느끼고 배웠던 것들을 나름대로 정리, 연재해 보았습니다. 지나치게 이론적으로 치우치지 않았었나, 그래서 글을 읽기에도 별로 재미없었지는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그래서 이번 마지막 글에는 광고제작 현장에서 있었던 실전사례를 실어서 약간은 더 흥미롭게 해드리고 싶습니다. 사실 아무리 광고에 대해 공부를 많이 했다고 해도 실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좀더 생생한 현장을 느낄 수 있도록 어느 한 기업의 기업PR 신문광고를 만들었던 아트 디렉터의 메모장을 몰래 훔쳐 보도록 하겠습니다.

# 전선이 있는 풍경

여기 소개할 국내 유수의 한 전선 기업의 광고는 수많은 회의를 거쳐서 ‘전선이 있는 풍경’이라는 표현 컨셉트를 만들었습니다. 아트 디렉터는 이 ‘전선이 있는 풍경’을 그럴 듯 하게 그려내기 위해 광고가 얼마나 리얼한가 아닌가에 대해 무척 많이 고민했습니다. 리얼리티를 확실히 살리기 위해, 좀더 욕심을 내어 한 컷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을 지금까지 아쉬워할 정도입니다. 이 캠페인의 생명은 바로 ‘계절성’인데, 항상 3∼4개월 전에 미리 만들어내야 하므로 계절에 맞춰 촬영을 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아트 디렉터의 후일담을 적은 메모장을 그대로 옮겨놓겠습니다.

#1. ‘봄, 꽃잎’ 편

‘봄’ 편 같은 경우는 전년도 여름에 제작하며 너무나 어려움이 많았다. 꽃잎은 어떻게 구하지? 슬라이드를 대여해서 합성을 할까, 아니면 봄까지 꾹 참고 기다리다가 리얼하게 한방으로 갈까? 결국 시간적인 한계를 고려해 일단 스튜디오에서 촬영은 하되 한방에 해결이 어려우면 부분 합성을 위주로 제작하기로 하고 벚꽃과 제일 비슷한 꽃을 구하러 다녔다. 양재동 꽃시장에서 5개의 화분을 사다가 미리 제작해 둔 수족관(가로2m, 세로2m)에 물을 가득 채워 꽃잎을 띄우고, 물 위에 반사되는 하늘은 종이에 하늘 프린트를 해서 3m 높이에 매달아 처리하고, 전선도 2m 높이에 걸어 한방에 촬영, 부분적인 리터치 합성으로 끝냈다<광고 1>.

#2. ‘여름, 개미’ 편

‘여름’ 편의 경우 어려웠던 점은 ‘전선이 있는 풍경’과 여름 풍경이 언뜻 생각하면 어울릴 것 같지만 사실은 어울릴 게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 때문에 아이디어 회의를 매일 밤늦게까지 해야만 했다. 한 달 동안…. 그런데 여러 자료를 보다가 민속촌에서 찍은 ‘땅바닥’이 눈에 띄었다. 그 땅바닥은 햇볕이 따뜻해 보이는 황토빛깔에 그림자까지, 그야말로 여름마당처럼 보였다. 그 자료 위에 전선의 그림자를 그린 뒤 개미가 지나가는 것처럼 낙서를 해 봤더니 그게 제대로 ‘그림’ 이 되어 실제 제작에 돌입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 민속촌에 있는 마당들을 돌며 촬영을 했다. 개미는 따로 찍었고, 버드나무 잎과 합성하여 처리했다<광고 2>.

#3. ‘가을, 잠자리’ 편

‘가을’ 편은 시안이 결정된 1년이 지난 후 또 다른 느낌의 시안을 요구 받았다. 다시 준비를 해서 광고주에게 제시한 바, 역시 처음에 본 광고시안보다 느낌이 덜한지, 지금의 광고안을 완성도만 높여 진행하자고 했다. 완성도…… 완성도의 관건은 실제로 살아있는 가을잠자리와 코스모스를 어떻게 구해 촬영을 할 것인가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잠자리도, 코스모스도 없는 이 계절에 어디서 그것들을 구해서 광고를 만들 것인가 답답했다. 그러면서 시간이 지나 8월 말쯤 되어서야 여의도에 코스모스가 피었다. 이때다 싶어 카메라를 들이대어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잡아 촬영했다. 결국 잠자리 · 코스모스 · 하늘 · 전선 모두 합성으로 처리했다<광고 3>.

#4. ‘겨울, 팽이’ 편

‘겨울’ 편 광고시안은 마지막편이라 그런지 모두들 부담스러워 하며 아이디어회의를 했다. 여러 개의 아이디어와 카피가 나왔고, 몇 번에 걸친 회의 끝에 시안이 압축되어 광고주 결재를 받았다. 그때가 10월말 정도였는데, 이제까지 만들었던 광고가 ‘대한 민국 광고대상’ 금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모두들 기뻐했다. ‘대한민국 광 고대상’ 신문 부문 최고상을 받다니…. 이 광고를 수용한 광고주에게 축하전화를 걸고 모두 기뻐하며 ‘겨울’ 편을 멋지게 마무리하겠다고 광고주와 약속했다. ‘겨울’ 편 광고제작의 난점은 리얼한 빙판 위에 팽이가 도는 모습을 어디서 어떻게 뽑아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슬라이드를 대여해서 합성하고 교정을 뽑아 보았다. 이때 여러 종류의 상황을 만들어서 광고주에게 제시를 했다. 그 중에 지금 나가고 있는 ‘겨울’ 편으로 결정되었다. 이것을 제대로 만들려고 빙판 (넓이 4m, 두께 1m)을 구해 4등분한 다음 스튜디오에 들여와 촬영하고, 전선 위 참새의 그림자는 동대문 새 시장에 가서 새 10마리를 구해 그 중 몇 마리를 하늘로 날려보낸 끝에야 완성했다. 팽이는 인사동 고물가게에 가서 구입했다. ‘겨울’ 편을 마치고, 이제까지 만든 광고의 이미지를 이용해서 2004년도 캘린더를 만들어 광고주에게 선물하는 것을 끝으로 ‘전선이 있는 풍경’을 마무리했다<광고 4>.

# 밤을 새는 풍경

광고를 만드는 사람들은 밤새기를 밥먹듯 합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찾을 때 그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한밤중이 좋아서입니다. 이 글도 밤을 새워 마무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