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ecial Issue | 광고회사, 변화의 한 가운데에서 / ② AP

사업 감각을 가진 AP가 살아남는다

박재항 / 제일기획 마케팅연구소 소장

1999년 2월 교육과 관련해 일주일간 홍콩(Hong Kong)으로 출장을 가 있는 동안에 서울 제일기획 본사에서 대대적인 조직 개편이 있다는 얘기가 들려 왔다. 함께 출장을 갔던 AE와 함께 홍콩사무실로 가서 개편 내용을 확인해보니, 어카운트 플래닝(Account Planning)이라는 기능이 도입이 되어 ‘어카운트 플래닝팀’이 새롭게 만들어졌고, 팀원들에게는 어카운트 플래너(Account Planner, 앞으로AP라 지칭함)라는 새로운 이름의 직종이 주어졌다. 어카운트 플래닝팀은 당시까지 ‘마케터(Marketer, 이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지만, 워낙 일상적으로 쓰이는 것이라 그냥 쓴다)’라고 불리던 마케팅팀에 있던 친구들이 거의 그대로 옮겨 와서 주조를 이루었지만, 간부급의 경우는 AE(Account Executive)출신들이 1/3 이상, 소수의 제작 출신들까지 합류한 연합군과 같은 형식이었다.

숫자의 틀에 갇힌 소비자의 마음을 통찰하다

필자는 마케팅연구소에 근무를 하다가 AP가 되었다. 그 이전에 마케팅팀에 있었던 경력도 있고 해서 꼭 이름표를 붙이고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대개의 사람들이 마케터 출신으로 분류하였다. 홍콩에 함께 갔던 AE가 ‘올해 인사의 하이라이트는 AP구만’ 하고 혼잣말처럼 조직 개편의 과감함과 규모에 감탄하면서도 자신이 한국 최초의 AP 대열에 합류하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과 어쩔 수 없는 약간의 비아냥거림을 담던 것이 아직도 뚜렷이 기억에 남아있다.

당시 AP제를 도입하면서 정의한 AP의 역할은 “소비자의 행동방식, 사고방식, 감성(emotion), 라이프스타일 등 질적(質的)인 데이터를 심층적으로 분석하여 광고기획, 크리에이티브에 기여”하는 것이었다. 기존에 비슷한 역할을 담당했던 소위 마케터들의 경우, 시장분석에 그것도 주로 양적(量的)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하는 경향이 있어서 광고기획 특히 제작 아이디어나 방향을 설정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부분이 약했다고 판단을 하였다. 이와 함께 광고주 측의 마케팅 기능과 인력이 강화되면서 마케팅 4P 전반을 광고회사에서 수행하거나 조언을 하기가 갈수록 힘들어지니, 소비자에 초점을 맞추어 “소비자에 대한 철저한 이해를 새로운 무기로 삼아 사내외 고객(클라이언트, AE, 크리에이터 등)들이 원하는 바를 실질적으로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역할을 재정립”했다. 그 주요 차이들을 정리하면 표와 같다<1>.

AP제도를 도입하면서 위와 같이 확고하게 정한 기준과 방향은 있었지만, 다양한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이 모이고 실제 업무에서는 서로 차이나는 기존방식으로 접근을 하다 보니 초기의 몇 개월은 제일기획에 맞는, 곧 한국적인 방식에 맞는 AP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기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크리에이티브 브리프에는 무엇이 들어가야 할 것인가, 제작에게 어느 정도 선까지 갖추어서 넘겨주어야 할 것인가, AE와 역할 분담은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등의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경합을 할 때 누가 프레젠테이션을 하여야 하나, 기획서의 마무리는 누가 할 것인가와 같은 실질적인 문제들이 계속 발생했고, 그 처리 방법과 결과 등에 관해서 팀내에서 논의가 계속되었다.

따지고 보면 이런 문제들은 AP가 도입되기 이전의 마케팅팀 시절부터 상존하던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은 담당자에 따라, 프로젝트의 성격에 따라 사실 그때 그때 다를 수밖에 없었다. AP제가 도입되면서 달라진 것은 광고회사 내의 각 기능 출신들이 모이면서 보다 현실적인 논의가 진행이 되었고, 보조적인 기능으로 인식되었던 소비자 조사와 연구 부문이 핵심기능의 하나로 인식이 되면서 각 부문 간의 균형이 잡힌 것이다.

규정된 역할 이상으로 AP제 도입이 가져 온 큰 의의와 성과는 데이터라는 숫자의 틀에 박제처럼 갇혀 있는 듯했던 소비자에게 호흡을 불어 넣고, 제작 과정을 통하여 날아오를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를 마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의 자료(information)와 정보(intelligence)의 단계를 넘어서 이제는 너무나 흔한 용어가 되어 버린, 보이지 않는 소비자의 마음과 그 배후 그리고 미래의 방향을 읽어 내는 통찰(insight)의 시대로 광고계를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AP가 한 것이었다.

AP제가 출범한 해인 1999년 중반부터 필자는 오길비&매더 뉴욕의 AP를 시작으로 FCB, 맥켄 에릭슨등 유수의 글로벌 광고회사 AP와 일하는 기회를 연이어 갖게 되었다. AP의 기본적인 역할에 대해서는 제일기획이 AP를 도입하면서 규정한 것과 다를 바가 없지만, 실제 역할을 수행하는 형태와 과정 그리고 책임의 범위는 회사마다 서로 달랐다. 서로의역사가 다르고, 문제를 풀어 가는 나름대로의 접근방식들을 가지고 있고, 광고주를 상대하는 원칙에서도 차이가 나니 AP의 세부적인 모습에서 차이가나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렇지만 한 가지, 강한 AP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료와 정보를 제공해 주는 기반이 확실하게 조성되어야 한다. 다수의 글로벌 회사의 경우는 축적된 자료와 함께 계속 새로운 트렌드와 지식을 수집, 분류하여 제공하는 지식정보센터를 가지고 있고, 그를 위한 조사 연구팀을 독립적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이 바로 소비자에 관해 AP가 통찰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경쟁력의 결정적 인자로 작용하고 있었다.

다매체 시대의 도래와 AP의 부침

2004년 7월 한여름 미국 뉴올리언즈에서 ‘용감한 생각(Brave Thinking)’이란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열렸던 ‘글로벌 어카운트 플래닝 컨퍼런스 2004(Global Account Planning Conference 2004)’에 참가했다. 어카운트 플래닝의 역사에 관해서 얘기를 하고, 광고의 발전에 AP들이 기여한 바 등을 주제로 한 발표와 시상 등이 이어졌는데, 유감스럽게도 필자에게는 AP들이 과거의 영광스런 시기를 회고하며 위안을 얻는 자리처럼 느껴졌다.

분명히 AP가 다른 누구보다도 무대 전면의 최고 스타였던 시절이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2000년 초 미국 주재 시에 전자 제품에 관한 미국 소비자 동향에 대하여 발표를 막 시작할 때, ‘(광고회사 내의) 미디어 부문이 스타로 떠오른다’는 그 주의 ‘이코노미스트’ 기사 스크랩을 보여 주면서 광고주의 대표가 매체계획부터 얘기하라고 할 때부터 AP의 역할과 위상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당시는 AP가 정점을 치고 있을 때였다. 미국에서는 AP가 좀 특수할 수밖에 없는 제작부문을 제외하면 가장 높은 연봉을 받는 직종이었다. 함께 일할 AP를 찾으려 미국 회사의 친구들에게 부탁을 하자 그 친구들이 자신들도 AP가 없어서 아일랜드 등지에서 높은 가격과 미국 생활의 장점을 미끼로 이들을 수입(?)한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AP의 역할과 위상이 축소된 것은 크게 보면 광고회사의 전통적인 사업 부문이 움츠러들고 상대적으로 광고주의 마케팅 기능이 확대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광고주들이 갈수록 소비자에 관해서 자신들도 충분히, 어떤 경우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며, 새로운 매체와 소비자 접점을 개발하고 실행하는 부분에 대한 요구가 많아지면서 전통적인 전략가로서의 AP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또한 특정 작업을 위해서 주어지는 기간은 갈수록 짧아지고, 다루어야 할 품목은 더욱 세분화되면서 전문성과 깊이에서 AP의 신뢰도에 대한 회의적 시선도 존재하고 있다. 최종 결과물의 주인이 아닌, 중간 과정의 참여자로서 AP의 존재감에 대한 문제도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전혀 다른 시각에서 시장 재단하고 제품 재해석하는 눈 키워야

“AP같은 AE는 실패하지만, AE같은 AP는 성공한다.”는 말을 후배 AP들에게 가끔 하곤 한다. AE같은 AP란 비즈니스, 그 중에서도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와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광고물의 콘셉트나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차원을 넘어서 광고주도 목말라 하고, 회사의 추가수익원을 창출할 수도 있는 새로운 소비자 접점을창조하는 쪽으로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사업적 감각을 지닌 AP가 되어야 한다.

제품 관련 자료의 양이나 전문적인 지식의 깊이에서 대부분의 AP는 광고주 담당자를 넘어서기 힘들다. 광고주들이 건네준 자료, 광고주들이 이미 시행한 조사와 거의 같은 형태로 진행된 조사결과를 가지고, 광고주들이 설정한 마당 안에서 얘기를 하고 있으면 거기서 광고주의 인정과 존경을 받기는 힘들다. 전혀 다른 시각에서 시장을 재단하고, 제품을 재해석하는 시도가 필요하다. 앞서 언급한 정보센터의 중요성도 특정 제품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광고주의 전문성을 넘어선 사회문화적인 트렌드까지도 포괄하는 지식과 관점에서 얘기한 것이다. 특정 부문의 기술자보다는 르네상스적인 지식인으로서의 AP가 필요하다.

2006년부터 지금까지 광고계를 넘어서 경제계와 일반 사회 트렌드에서까지 최고의 화제어가 ‘Web 2.0’이라는 데 큰 이의를 달기 힘들 것이다. 다른 분야에서도 그렇겠지만, 인터넷은 AP에게 큰 힘이 되기도 했고, 위기로 모는 역할도 하였다. 정보의 보고(寶庫)이자 정보 수집의 수단과 통로로서 인터넷은 초기 AP의 핵심적인 수단 역할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인터넷은 AP를 배제하고 광고주와 소비자를 직접 잇고, 그들이 맘대로 정보를 찾고 이용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다. 이제 AP는 과거와 같이 정보마당으로서 인터넷을 이용하는 Web 1.0에서 벗어나, 과정의 주요 참여자로서의 과거의 역할에서 조금 더 나아가 중간 시스템의 창조자이자 진행자가 되어야 한다. 곧 약간은 폐쇄적이었던 현재까지의 광고 커뮤니케이션 전략의 수립과 실행이라는 프로세스를 ‘공유, 참여, 개방’이라는Web 2.0의 키워드들이 반영된 Ad 2.0의 것으로 적용해야 한다. 또한 소비자와 광고주가 특정 제품에 단선적으로 얽매이지 않고 공감하며 즐길 수 있는 무한대의 공간을 제공하고, 없는 듯 그것이 운영되도록 이끄는 모더레이터(Moderator)의 역할을 바로 AP들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