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Relay | 『아르헨티나 할머니』

내일의 유적으로 남을 우리의 오늘을 위하여

고윤미 / 인사팀총무팀 사원

어두운 골목 길 한쪽에 서서 그 끝을 가만히 바라보면, 보이는 것이라곤 까만 어둠 뿐이다. 촘촘히 늘어선 가로등 불빛도 그 길 끝에 무엇이 있는지는 비춰주지 못한다. 문득 사람의 사는 일이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밝았다, 어두워졌다, 다시 밝아졌다…. 어둠 끝에 빛이 있음은 누구나 알지만, 길이 끝나는 곳에서 무엇을 마주하게 될 것인지, 그것만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분명한 것은 두 발로 딛고 선 지금 이 순간과 오늘 자신이 내딛는 걸음 걸음이 내일의 또 다른 발걸음을 결정하게 되리라는 것뿐. 때문에 주어진 순간을 치열하게 사는 것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이다.

내가 『아르헨티나 할머니』를 선택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이 책 안에는 소중하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삶의 아름다움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다른 작품들이 그러하듯 이야기는 상실에서 출발한다. 나는 아직 여기 있는데 소중한 사람은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주는 깊은 슬픔이 변화의 시작이다. 그러나 주제는 ‘슬픔’이 아니다. 구구절절하게 얼마나 아픈지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한 사람이 우리 곁에서 떠난다고 그 사람에 대한 기억도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아프다. 그러나 남아있는 사람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그 아픔을 치유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아간다. 슬프지만 담담하고, 아프지만 유쾌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인공인 나, 미쓰코는 열 여덟 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는다. 어린 나이에 그녀는 소중한 사람을 잃고 그 사람이 속해 있던 하나의 공간을 잃는다.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사랑했던 사람의 존재가 희미해지는 그 고독과 아픔의 한 가운데에서도 미쓰코는 눈을 감고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망치지 않는다. 대신 힘차게 앞으로 나아간다. 덕분에 그녀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선물을 받는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고 그곳에 열리는 다른 세계를 맞이하는 경이로움이라는 선물을.

요시모토 바나나 소설의 원형을 이루는 상실로 인한 상처와 타인과의 소통을 통한 그것의 치유뿐만 아니라, 그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이 작품이 나를 매료시킨 것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 자신과는 다른 것에 두려움 없이 손 내미는 인물들의 강인함이었다.

아르헨티나 빌딩의 낡은 대문을 밀고 그 안에 들어서지 않았더라면 그녀는 흘러간 시간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그 공간이 주는 묘한 편안함도, 이전까지와는 조금 다른 얼굴을 한 아버지의 모습도, 그리고 사랑스러운 동생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더불어 자신을 위한 유적을 스스로 남기겠노라는 꿈도 낯선 이야기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른다. 미지의 공간이라고만 생각했던 아르헨티나 빌딩에서의 일상에 익숙해진 어느 날, 미쓰코는 생각한다, ‘그리움이란, 모든 것이 달라진 후에야 비로소 싹트는 것’이라고.

시간은 그저 흘러가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쌓여서 나름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마치 나무에 새겨지는 나이테처럼, 정직하게.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자리에 대한 충실함만이 나를 다음 단계로 이끈다. 그래서 나는 지금, 묻는다. “일생에 걸쳐 남기고픈 당신의 유적은 무엇인가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