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계, 무명모델이 뜨고 있다
최근의 국내 CF에 나타난 이상기류 ‥‥ 빅모델은 가고 있는가?
이현우/이소가와팀 카피디렉터
광고모델계에 삼손과 데릴라는 사라져 가는가? 이른바 빅모델이라 불리는 억대 모델들이 광고 CF에서 하나둘 자취를 감추고 있다. 한때 전성시대를 구가하던 CF의 큰 별들이 서서히 별똥별로 떨어져 내리고, 그 자리를 혜성들이 메꾸고 있다. 유명 인기 탤런트들이 판을 치던 광고모델 계에 불기 시작한 새로운 기류, 신선한 바람이라고나 할만한 이러한 변화의 한 자락은 무명모델들이 몰고 왔다. 인기 탤런트도 아니고 모델을 직업으로 하는 전문 연기자도 아닌 일반 모델로 대체되는 광고의 새로운 모델전략, 물론 몇몇 CF에 나타난 징후들을 보고 우리 광고의 전반적 흐름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움직임을 주도한 몇몇 요인들은 최근 들어 더욱 뚜렷해 졌다는 것이다. 먼저 천정부지로 치솟아 오른 유명모델의 개런티다. 모델 전속계약금의 일억 상한선은 이미 무너진지 오래, 개런티 상승속도는 이제 거의 무제한의 경지에 들어섰다. 맥주 CF 1건에 4억원을 받은 영화배우가 광고계에 화제를 모은지 채 일년도 안되어 어떤 신흥 컴퓨터 유통업체는 요즘 한창 잘 나가는 여자 탤런트에 1O억원 전속계약을 제의, 광고 업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모델개런티의 마지노선을 또 한번 무너뜨린 이 사건은 앞으로 빅모델을 활용하는 광고에 엄청난 제작비 부담을 안겨줄 것이 확실하다. 또 하나 모델 전략을 바꾸는 광고환경적 요인은 최근의 테마인 Globalization이다.
세계화, 국제화라고 불리는 이 사회적 이슈는 광고모델에 있어서도 해외에 문을 활짝 열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개런티 1,2억 또는 그보다 낮은 지출로도 국내 빅모델 못지 않은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판단일 거다. NBA프로농구의 주전 센터 샤킬 오닐이 펩시콜라, 역시 NBA의 최단신 가드 타이론 보그스가 현대자동차 액센트, 배우 킴 베신저가 태평양 샴푸, 영화 '나홀로 집에'의 매컬리 컬킨이 LG전자 '심포니 홈' 컴퓨터, 형사 콜롬보의 피터포크가 한국안전시스템, 포청천의 금초군이 제일약품 녹용드링크 등등 ‥‥
해외물을 통해 눈에 익었던 월드스타들이 CF를 통해 우리 안방까지 들어왔다. 제품 잘 팔리는데 제 몫만 톡톡히 한다면 굳이 국내 유명모델의 몸값싸움에 말려들 이유가 없다는 얘기도 된다. 게다가 그들을 외면하는 또 하나의 명분이 있다. 일부 유명모델들의 겹치기 CF출연이 그것이다. 이곳 저곳 업종을 가리지 않고 중복 출연하는 모델은 그들만의 고유한 개성을 잃어간다는 것이다. 광고모델의 이미지는 그가 출연하는 제품의 이미지로 스 며들어 소비자가 그 모델을 제품의 이미지와 동일시하게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무분별한 중복출연의 경우, CF를 보고나서 그 모델의 이미지와 제품의 이미지가 명쾌하게 연결되지 않는다. 광고가 모델에 지불하는 거액의 몸값은 바로 상표의 개성과 직결된 다는 데 있다. 이런 저런 이유들로 광고주나 광고제작자들은 더 이상 빅모델에 목을 매달지 않는 것이다. 최근 유명하지도 않고 고액의 개런티를 받지도 않는 일반모델들이 광고를 성공적인 캠페인으로 만드는 사례들이 주목을 받고 있다.
가장 주목받는 광고로 하이트캠페인을 들 수 있다. 하이트맥주가 찾은 모델들의 공통 컨셉트는 우리 시대의 뉴리더라는데 있다. 하나같이 각 분야에서 전문가로서의 Top Image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리더 이미지를 맥주의 리딩브랜드라는 이미지로 전이시키는 데 성공한 캠페인이라 여겨진다. 조사 전문기자 김행, 영화감독 여균동, 카피라이터 오혜원, 재즈 연주자 이정식, 프로기사 유창혁, 비디오자키 재키림, 교통문제 전문가 박용훈, 소설가 김진명‥‥ 나름대로 신세대의 총아 내지 전문 직업인의 행보를 인정받고 있는 리더라 할 수 있다.
연출하지 않은 듯한 연기, 꾸밈없는 멘트, 감각적인 화면구성 등에서 세련된 맥주의 캐릭터가 더해지고 있다. 거의가 CF는 초년병인만큼 제작의 어려움도 만만찮았다. 유창혁은 멘트를 소화하는 솜씨가 너무 서틀러서 촬영에 곤혹을 겪었지만 편집과정에서 살려내는 행운을 얻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촌스런 연기가 오히려 자연스럽다는 반응이었다. 주어진 대본을 매끈하게 읽어내는 잘빠진 CF보다는 한결 색다른 점이 있지 않냐는 얘길거다.
김진명의 경우 주어진 콘티에 거부입장을 나타냈다 한다. 다음에 나올 소설작품을 의식해서인지 직접적인 제품멘트에는 당혹감을 나타내었단다.
"뭐가 좋다고 하면 사람들은 믿지를 않아요, 물이 깨끗하다고 말해도 마찬가지‥‥" 이렇게 둘러치는 멘트가 사실은 더 힘을 발휘했다. 작가는 거기까지만 얘기하고 제품 얘기는 전문성우가 읽어주는 구성이다. 물이 좋다는 얘기를 상업적으로 하면 사람들은 일단 불신한다는 입장이었다. 세상을 늘 수상쩍은 눈으로 바라보는 소설작가답게 비상업적인 멘트를 덤덤하게 했는데 바로 그점이 제품의 신뢰를 높인 걸로 보인다.
100% 암반 천연수로 만든 맥주라는 사실을 직설적으로 반복해오던 지금까지의 광고 전개에서 이 캠페인은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했다. 리딩브랜드의 자리를 더욱 굳히는 자신감있는 광고전략이라 생각된다. 이에 대해 라이벌이라 할수 있는 넥스맥주의 공세도 대단했다.
"소비자가 찾은 깨끗한 맥주"라는 대소비자 약속을 신세대의 다양한 증언으로 뒷받침하고 있다. 처음부터 소비자의 기호와 욕구를 치밀한 조사로 파악해서 탄생시킨 신세대 맥주임을 그럴싸하게 주장하고 있다.
일반모델을 써서 작품으로서의 성가를 올린 광고전은 일찌감치 보일러 광고에서 불붙었다. 경동보일러 광고는 동양적인 효의 정서를 표현해서 판매와 연결한 역발상이 돋보였다. "아버님댁에 보일러 놔 드려야겠어요'라 는 키워드 하나로 보일러의 판로에 돌파구를 마련했다.
강원도 철원의 양로원에서 수배한 두 노인들은 1차 광고에서 기성 빅모델 못지않게 자연스런 부부의 모습을 연기해 냈다. 연출하지 않은 듯한 무연의 연기가 단연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촬영헌팅길에 양로원에서 찾아낸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촬영전 서로간에 일면식도 없었던 분들이라는 사실‥‥ 그 천연덕스럽게 부부연하는 모습을 다시 한 번 떠올리면 적잖은 충격을 받는다. 제품의 판매실적을 껑충 뛰게 하는데 광고가 단단히 한 몫을 했다는 분석도 나와 있다 포장마차에서의 젊은 부부의 대화로 구성된 2차 광고는 완성도나 감동에 있어 1차 CF에는 못 미치는 작품으로 보인다. 수작 뒤의 평작이라고나 할까? 다소 건조한 느낌 또한 지울 수 없다. 드라마 'M'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3차 광고에서 뭉클한 감동은 재연되고 있다.
"에미냐?"
힘없는 목소리로 며느리를 맞는 할머니의 고독한 대사, 을씨년스런 방안의 조명 등이 한번쯤 시골에 계신 노부모를 돌아보게 하는데 한 몫 하고 있다. 경동보일러 광고를 제작한 스탭들이 막상 경계하는 라이벌은 귀뚜라미보일러 업계 1위를 고수하고 있는 이 회사의 광고캠페인도 나름대로 무명모델전략의 성공 케이스로 보인다. "물이나 한 잔 주십시오"는 장안에 화제가 되었던 유행어. 무료서비스를 하러온 기사가 고마워하는 주부의 말에 무심코 한 대사다.
이 키워드는 귀뚜라미보일러의 서비스 정 신을 그대로 담은 명카피였다. 진솔한 표정의 기사가 남긴 순박한 한 마디는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그런 차별화된 서비스 정신은 2차, 3차로 제작된 최진홍 사장편에서 그대로 이어진다. 다소 촌스럽고 무뚝뚝해 보이는 사장의 성실한 태도가 그대로 신뢰감으로 전이되는 대목이다.
일반모델이면서도 결코 무명모델이라 할 수 없는 CF계의 기린아가 있다. 대우전자의 배순훈 사장이 바로 그 주인공, 광고에 비쳐진 그의 모습은 탱크주의를 전파하는 전도사처럼 보인다. 사장의 직위에서 오는 카리스마적 권위보다는 공학박사로서의 전문가적 권위가 철철 넘치는 광고다. 주부들의 인기도 순위에서 그는 거의 일년내내 Top Model의 자리를 내놓지 않았다.
최근에 방영되는 CF에서 대우전자는 "핵심기술"을 새로운 전략개념으로 내놓고 있다. 세미나를 위해 모인 중앙기술연구소의 젊은 박사들에게 카메라의 앵글을 고정시켰다. 마치 스냅사진처럼 찍어 박진감있게 편집한 화면에서 연구진들의 묵직한 중량감이 느껴진다. 그들의 눈빛에서 결연한 기술개발 의지와 정진하는 연구자세가 엿보인다.
배사장은 "꼭 필요한 기능을 단순하고 편리하게 만든 기술, 이것이 대우전자의 핵심 기술입니다"라고 설파하고 있다. "탱크주의, 대우전자의 핵심기술입니다"라고 힘주어 말하는 그의 모습에서 어떤 빅모델도 가질 수 없는 메시지 전달력이 느껴진다.
로가디스 광고는 마치 한 편의 비디오아트같은 감각을 담은 작품이다. 깨끗한 편집과 따뜻한 인물의 표정, 수채화같은 은은한 영상미가 돋보이는 CF, '오변호사 배변호사"라는 TV프로에서 이미 인기를 굳힌 오세훈 변호사의 연기력이 그대로 화면에 무르익어 있다. 특유의 온화한 이미지와 스마트한 풍모가 이태리정장 로가디스의 상표개성을 잘 살려내고 있다. 누구라도 저 남자처럼 "이 세상에서 가장 편안한 남자가 되고 싶다"라는 동경에 사로 잡히게 하는 매력을 그가 갖고 있다.
해태제과의 덴티큐를 빼놓을 수 없다. 치과의사 정동인의 연기는 프로의 경지에 다다라 있다. 방송이나 잡지를 통해 이미 무명을 벗은 세련된 매너와 능숙한 멘트, 전문성우를 따로 필요로 하지 않는 수준급의 멘트소화 솜씨, 빅모델 못지않은 연기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는 제작자의 귀띔이었다. 핸섬한 마스크와 매력적인 보이스, 여고생으로 분한 여자모델의 애교가 철철 넘치는 연기, 이들이 절묘하게 어울려 제품의 매력을 끌어올린다. 치과의사의 처방목록에 마치 덴티큐가 있기라도 한 듯한 착각이 일 정도, 정말이지 '덴티큐 씹다가 다른 건 못 씹겠더라구요."하는 반응이 나올 성 싶다.
큐마크를 보고 껌을 산다는 소비자가 슈퍼에서 가끔 눈에 띄는 걸 봐도 광고효과는 짭잘한 셈이다.
롯데제과 덴티스트의 맞대응도 볼만하다. 인기작가이자 방송인인 김한길을 기용, 감칠맛 나는 CF로 맞서고 있는 것, "치과에서도 팝니까"라는 그의 멘트가 익살스럽다. 때마침 대히트를 한 영화 <닥터봉>은 이 카피를 받아 광고포스터에서 "치과에서도 팝 니다"라고 의뭉을 떨었다. 덴티큐와 덴티스트는 누가 누구를 도와주고 있는지 모르지 만 브랜드의 유사성 때문에 서로가 무임승차 효과도 거두고 있다는 분석.
아마추어모델이 시청자의 눈길을 끈 또 하나의 사례로 조흥은행 광고를 들 수 있다. 이 은행의 이종연 전행장과 축구감독 차범근씨가 등장한 CF가 그것이다. 근엄하게 화면 한가운데 서서 "저희 은행은…"이라고 시작되는 메시지를 말하는 대신 느닷없이 물구나무 선 행장의 괴상한 포즈가 화면을 채운다.
"가끔 세상을 거꾸로 보면…"이라는 자막과 함께, 고객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은행의 문제점이 더 잘 보인다는 이야기를 이렇게 하고 있다. 고객의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 드리겠다는 은행 최고경영자의 결연한 의지가 잘 드러난다. 신경영을 위해서라면 그깟 알량한 체통이나 품위 정도는 가볍게 포기해 버리겠다는 대표이사의 허물벗은 심정이 실감난다.
"좀 엉뚱한 아이디어라 출연이 가능할까 걱정도 했었죠, 그러나 막상 콘티가 팔리고 제작이 결정되니까 행장님을 설득하는데 큰 문제는 없었습니다." 이 광고아이디어로 경쟁프리젠테이션을 승리로 이끈 제작담당자의 회상이다. 이 광고는 일본 요미우리 신문 등 해외 저널에서도 특집으로 다룰 정도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차범근의 옐로우 카드편은 이 광고의 후속탄으로 나온 또 하나의 신경영 테마광고. 축구감독이 소개하는 은행의 옐로우카드가 은행이 가진 불만점에 대해 고객이 내미는 옐로우 카드로 동일시 될지는 일단 미지수다.
현대자동차의 기업광고 두 편도 모델전략으로 독특하다.
'땀의 가치를 소중히 하는 사람들이 현대 자동차를 이끌어가고 있습니다'라는 키워드와 함께 다소 투박해 보이는 엔지니어들이 나와서 기름기 밴 현장냄새를 잔뜩 풍기고 있다. 기술공정의 책임을 맡고 있는 기장들 가운데서 중역회의에서 선정한 모델들이란다. 권영삼, 장근호 씨가 그 주인공인데 권 씨가 나오는 CF의 경우 실제 주인공은 그의 부인이다. 바깥양반의 기름때 묻은 잠바 이야기, 인고의 세월을 남편 뒷바라지에 바쳐온 근로자 아내의 애환이 물씬 느껴지는 CF다.
쌍용제지 기업광고는 인기 MC 김동건씨의 프리랜서 선언과 때를 맞춰 만들어졌다. 그의 화려한 캐릭터가 돋보이는 CF였지만 엄밀히 말해 이 광고의 주인공은 그의 중·고등학교 동기 동창인 이 회사 사장, "한결같은 정성으로 깨끗함을 만듭니다" 라는 메시지와 함께 그들의 30년 넘은 해묵은 우정이 깨끗한 정성으로 잘 치환되어 있다. 신문과 여성지 등에 주인공들의 우정에 관한 기사와 특별대담들이 나가는 등 광고 외의 홍보활동도 CF못지 않은 기업광고 효과를 거두었다고 제작대행사 AE가 전해 주었다.
사용해본 주부들의 실제 증언을 간결하게 엮은 도브비누 CF도 일반모델 광고의 신선한 사례다. 다국적 기업인 도브 본사의 CF포맷을 응용한 구성은 광고의 국제화전략과도 연결된다. '매끈하다', '촉촉하다', '당김도 없고 부드럽다' '순하다'라는 주부들의 사용소감이 한결같이 이 제품의 셀링포인트인 "건조해지지 않습니다"라는 메시지로 집약된다. 그러나 이미 세제 스파크의 실증광고를 통해 이런 종류의 광고에 익숙한 여성들에게 얼마나 색다른 광고로 보였는지는 의문이다.
최근에 나온 '효'시리즈는 무명모델을 활용한 광고가 이렇게까지 만들어질 수도 있구나라는 찬사를 부르게 하는 작품이다. 어버이날을 맞아 삼성생명이 기업광고로 기획, 제작한 캠페인 광고, 한 기업의 공익적 메시지가 우리 사회에 끝없는 파장을 불러 일으켜 일종의 신드롬으로까지 이어졌다. 제작팀에서는 이 인쇄 광고를 포스터로 제작 배부하는 외에 부모님의 사진을 보내주면 액자로 만들어주는 또 하나의 캠페인을 벌여야 했다. 신문, 잡지, 방송 등 매스컴에서도 광고 문안을 인용하는 등 그야말로 인구에 회자 되는 광고 그 자체였다. 우리 주변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친근하고 평범한 아버지, 어머니가 모델로 나온 광고였지만 압권은 단연 카피였다. 광고문안 하나하나에 "바로 내 이야기"라며 무릎을 치게 하는 공감이 숨쉬고 있다. 여의도에서 중국집을 운영하는 할아버지, 이대 앞 노인대학을 다니는 할머니가 모델로 나오는 깔끔한 지면구성도 힘이 있어 좋다. 우리나라부모의 전형적인 모습을 찾아 낸 아트디렉터에게도 갈채를 보내고 싶다. 아무튼 모델전략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광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