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다채널시대 방송 공익성의 재해석: 소비자주권주의
케이블방송과 위성방송이 도입되고 방송의 디지털화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방송은 지금까지와 전혀 다른 환경을 맞이하고 있다. 특히 인터넷방송까지 가세하면서 방송채널은 거의 무한대로 늘어날 전망을 보이고 있다. 이런 환경변화는 지금까지 전파자원(채널)의 희소성을 근거로 하여 방송의 공익성을 요구했던 규제정책의 기본 가정을 흔들고 있다. 특히 미디어기술의 융합현상으로 기존의 미디어가 멀티미디어로 전환되어 가는 상황에서 미디어간의 구분이 무의미해지고 있으므로 방송을 신문 등의 인쇄매체와 질적으로 다른 것으로 간주하여 실시되었던 규제는 더이상 정당화되기 어렵게 되었다. 채널의 희소성 문제가 해결된 상황에서 더이상 희소한 자원의 사용대가로 공익적 프로그램의 방영을 요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5)
이런 상황에서 세계 각국은 기존의 방송제도를 개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각국의 정치적, 경제적, 역사적여건을 고려하여 이루어지는 방송법 개정의 방향은 탈규제와 사기업화로 요약될 수 있다. 탈규제와 사기업화는 소유제한, 시장진입제한, 내용 제한 등의 규제를 풀어 사기업들이 늘어난 채널들을 구입, 운영하게 함으로써 방송의 상업적, 산업적 기능을 최대한으로 살리는 가운데 시장경쟁력을 향상시키도록 하자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채널의 증가는 시청자에게 채널선택의 기회를 확대해 주는 한편, 시장경쟁의 결과 시청자의 취향과 욕구를 더욱 효율적으로 반영하는 양질의 방송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는 전망에 입각하여 방송의 탈규제가 추진되고 있다.
이처럼 다채널화가 진행되면서 시장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방송정책은 시청행위를 소비자가 시장에서 상품(프로그램)을 선택하는 행위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고, 소비자가 자신의 선호를 가장 잘 충족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함으로써, 혹은 원하지 않는 프로그램은 시청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권리를 행사한다고 파악한다. 즉, 시청자의주권을 소비자의 선택권으로 환원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프로그램 공급자가 소비자의 권리를 극대화하는 길은 가장 많은 소비자들의 선호를 충족하는 프로그램을 시장에 내놓는 일이다. 그러므로 채널의 차별화와 특성화가 이룩된 다채널시대에는 프로그램 선택의 폭이 한층 확대되므로 소비자의 권리가 더욱 신장될 수 있다는 ‘소비자주권주의’가 공익성 개념의 새로운 해석으로 제기된다.
하지만 시청자주권을 소비자주권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견해는 시청률 경쟁을 미화하는 소극적이며 탈정치적인 접근이라는 비판을 받는다.6) 시장경쟁의 심화는 시민권의 약화를 초래하기 때문이다. 채널의 증가로 소비자들이 프로그램을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늘어났지만 시청자를 확보하기 위해 시장경쟁에 시달리는 채널들이 제공하는 의견의 다양성은 오히려 줄어들며, 시청자가 시민으로서 방송채널을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은 축소된다고 할 수 있다. 방송재정의 광고의존도가 높아질수록 시청자의 요구보다는 광고주의 요구가 프로그램의 제작방향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소비자(시청자)의 선호는 이미 제공된 시장의 상품(프로그램)들을 통해서만 충족될 수밖에 없으므로 소비자들이 상품의 공급, 유통 및 소비형태를 결정하는 시장의 게임법칙 결정에 관여하거나 게임법칙을 바꾸려는 능동적 시도와 정치적인 개념으로 되돌려 놓기 위해서는 시청자를 시민으로 인식하는 발상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비슷한 맥락에서 경제적 측면이 강조된 서구형 소비자주권론을 맹종적으로 부각시키기보다는 정치적 의미가 내재된 시청자주권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방송의 산업진흥을 꾀함과 더불어 민주주의의 정착에 힘써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지닌다고 하겠다(이창근, 1994, pp. 38∼44).
시청자들은 자신들이 속한 지역사회의 성격이 어떠하며 각자가 지역사회와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고, 사회안에서 자신들이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고 정치과정에 효과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시민교육적 방송을 요청할 권리가 있다. 그러므로 방송은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보도뿐만 아니라, 공공문제의 쟁점을 충분히 심층적으로 제시하는 한편, 시청자들은 그러한 쟁점들이 그들의 일상생활과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지를 이해하고 나름대로의 정치적 판단을 유도하여 정치과정에 활발하게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을 배양해야 한다. 그러나 방송의 산업화 혹은 사영화 정책은 ‘방송사업자’개념의 도입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시청자를 산업진흥에 기여해야 할 소비자로만 인식할 뿐 시민으로서의 역할에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앞으로 더욱 치열해진 채널간의 시청률 경쟁으로 말미암아 오락적 요소가 적은 토론프로그램과 교육프로그램이 한층 더 주변화될 것임을 어렵지 않게 전망할 수 있다. 시청자의 소비자 역할만을 강조하는 방송산업정책은, 케이블방송의 상호작용을 지역사회의 공론권 활성화를 위한 시민들의 참여마당보다는 주로 마케팅전략의 쌍방향적 유통을 가능하게 해주면서도 케이블채널이 시민들의 정치정보 유통경로로 사용되는 것을 억제하고 있다. 이렇듯 디지털시대의 쌍방향 부가서비스는 숙의민주주의를 활성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보다는 소비시장을 재생산하고 확대하는 마케팅수단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감안하면, 이러 한정책은 뉴미디어를 이용한 숙의민주주의의 실현을 더욱 불투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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