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아날로그시대의 방송규제와 공익성
미국의 경우를 보면 아날로그 지상파 방송시대의 규제는 ‘공중의 이익, 편의와 필요’라는 다소 추상적이고 모호한 원칙에 의해 비롯되었다. 1934년에 통과된 미국의 통신법에서는 전송체(common carrier) 규제 모델을 주장하는 방송사업자들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면허제 실시를 명시하고 있으며, 면허취득의 조건으로 ‘공중의 이익, 편의와 필요’를 명시하고 있다. 이러한 개념들에 대해 구체적인 정의가 내려지지는 않았으나, 방송내용의 공익성을 요구하는 근거로서 전파자원의 희소성(scarcity) 원칙을 제시하였다. 희소한 자원인 전파가 원래는 공중의 소유이므로 공익성을 조건으로 특정인에게 방송경영을 맡기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규제근거의 의해 운영되는 방송모델을 공중수탁자(pubic trustee) 모델이라고 부른다.
수탁자 모델을 방송에 적용함으로써 방송규제는 다른 미디어의 규제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이게 된다. 1969년 Red Lion 사례에 대한 판결에서 미국의 대법원은 방송사업자를 공익의 수탁자로 규정함으로써 공익성을 구현하도록 방송내용을 규제하는 것은 연방수정 헌법 제1조를 위반하는 것이 아님을 천명하였다.2) 따라서 등록제로 운영되는 신문과는 달리 허가제로 운영되는 방송은 허가 혹은 재허가 조건으로 공익성의 의무를 다하도록 되어 있다. 여기서 자원의 희소성이란 절대자원의 희소성을 의미하기보다는 사용 가능한 자원에 비해 사용신청자(방송면허신청자)의수가 많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신문의 자원이든 방송의 자원이든 모든 자원은 유한하다고 볼 수 있으나, 절대량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수용공급의 차원에서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방송사에 수탁자 모델을 적용해 왔다. 희소성 원칙 이외에도 방송의 공익성을 강조하는 근거로서는 방송이 타 매체에 비해서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는 점과 방송콘텐츠는 공공재적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거론되기도 한다.
한편 방송에게 공익성을 요구하는 또 다른 이유로서 방송의 민주적 역할을 강조하는 입장이 있다. 방송의 민주적 역할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방송이 규제를 받아야 하는 근거로서 전파자원의 희소성 원칙이나 방송의 사회적 영향력보다는 방송이 숙의민주주의(deliberative democracy)를 구현하는 기능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신문과 방송이 공히 숙의민주주의를 구현하지 못했을 때 규제의 대상이 되며, 이 것은 연방수정헌법 제1조를 위반하는 것이 아니라고 간주한다. 숙의민주주의자들은 하버마스의 공론권 개념을 방송의 공익성과 연계시키면서 다양한 의견의 유통을 숙의의 핵심조건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방송의 공익성은 시청자들이 다양한 견해를 접하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는 마당을 제공하는 데에서 구현된다고 하겠다. 이런 입장은 방송의 공익성을 “시청자가 원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는 것”으로 정의한 시장주의자들의 접근과는 많은 차이를 보인다. 공익(public interest)과 공중이 관심을 가지는 것(what interests the pubic)은 대부분의 경우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공중으로서의 시청자는 자신의 개인적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오락성이 강한 방송을 원하는 경향이 있으므로 시청자 취향의 최대공약수를 공익이라고 보는 정책은 숙의민주주의에 오히려 해악을 끼친다는 것이다(Sunstein, 1993, pp. 241∼252).
이렇듯 다양한 정의와 이론적 근거의 존재로 말미암아 공익성 개념에 관한 논의는 필연적으로 많은 혼란과 오해를 야기한다. 이러한 혼란은 공익성 개념이 각기 다른 민주주의 이론의 토양에서 배태되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라고 하겠다. ‘사상의 자유시장’원칙을 고수하는 시장민주주의에 따르면, 공익성은 사상의 시장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선택한 의견에 기초하여 규정된다고 본다. 즉, 다수결 원칙에 따라 다수의 이익을 곧 그 사회의 보편적 이익으로 간주하여 이를 공익성의 기준으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공익’(public interest)과 ‘공중의 이익’(public’s interest)을 동일시하는 이러한 견해는 공익성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개인들에게 직접 물어 보면 된다는 다수결제도를 제안한다. 시장주의자들은 상업방송도 다수 시청자들의 이익을 프로그램 제작에 반영함으로써 공익성을 실현할 수 있으며, 시청률이 바로 공익성 측정을 위한 타당한 지표가 된다는 견해를 피력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레이건 행정부 당시의 FCC 위원장이었던 마크 파울러(Mark Fowler)는 “시장만이 미국 국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가장 잘 알고 있으므로 탈규제가 공익구현을 위한 최상의 선택”이라고 공언했다(Brown, 1981, pp. 21∼22).
그러나 시청자가 자신의 이익이 무엇인지 명백히 잘 알고 있으며, 그 이익에 따라 자율적으로 프로그램을 선택한다는 가정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개인의 이익을 규정하는 과정에서 개인의 진정한 이익을 외면하는 정치권력과 시장의 영향력이 얼마든지 개입될 수 있기 때문이다. 시청자에게 주어진 선택의 폭은 시청자 자신이 구축해 놓은 것이 아니라, 정치권력과 시장의 상호작용에 의해 결정된 선택의 범위이므로 개인의 자율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시장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시장의 확대 재생산에 기여하는 선택을 선호하기 마련이므로 기존의 시장질서나 게임법칙에 저항하는 개혁적 대안은 선택의 범주 바깥으로 밀려나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볼 때 시청률은 이미 시장에 나와 있는 기존 프로그램들 중의 선택을 의미할 뿐 시청자의 의견을 측정하는 척도가 되지 못한다.3)
따라서 시청률을 일종의 ‘투표’결과로 간주하고, 이를 통해 시청자의 의견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수렴할 수 있다는 생각은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다. 높은 시청률의 프로그램은 주로 시청자들에게 사적인 즐거움과 흥미를 극대화시키는 것들인데, 이들은 공공문제에 대해서 어떠한 의견이나 시사점도 제시하고 있지 않아 공론권 형성에 기여하기는커녕 오히려 공론권 축소의 원인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시청률조사의주목적은 시청자들의 취향이나 욕구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방송사나 광고주에게 광고요금의 협상에 필요한 정보(상품)를 팔기 위한 것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시장민주주의에 기초하여 공익성 개념을 규정함으로써 생기는 또 다른 문제는 공익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시장의 진열장에서 상품을 고르는 사적 행위와 동일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사회적 쟁점에 관한 다수의 의견이 무엇인지를 시급하게 알아보기 위해서 즉각적인 전화 설문조사를 실시하고, 이 결과를 여론으로 규정하여 공익성의 판단기준으로 삼는 방송관행은 시청자들에게 공공토론의 장을 부여하는 과정을 생략함으로써 무엇이 공공선을 위한 최선의 선택인지를 심사숙고할 만한 여유를 허용하지 않는다. 토론과정을 배제한 채 개인들의 즉각적인 의사표시의 총합을 여론으로 간주하는 상황에서, 즉 공공선이 아니라 사적인 의견이나 이해만이 표출되는 상황에서, 개인들은 자신의 의견을 다른 사람들의 의견들과 비교·검토하면서 신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잃게 된다.
언론의 자유개념에 대해서도 시장민주주의와 숙의민주주의는 서로 다른 입장에서 접근하고 있다. 방송매체를 상업적 목적으로 활용하려는 방송사업자들은 물론 시장민주주의를 변론하고, 방송매체를 통해 공공문제에 관한 숙의를 이끌어 내려는 사람들은 숙의민주주의의 전통을 따른다. 시장민주주의자들은 언론의 자유에 대한 이론적 근원을 ‘사상의 자유시장론’에 두고 잘 기능하는 언론시장에게 맡기면 공익성의 문제를 저절로 해결될 것이라고 낙관하는 반면, 숙의민주주의자들은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근거를 공적 숙의과정의 존재에서 찾으면서 정부가 다양한 의견을 증진시켜 시청자들이 공공문제에 관해 관심을 갖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상파방송의 출현 이후 공익성 논쟁은 ‘사상의 자유시장론’(free marketplace of ideas)과 ‘공적 숙의론’(public deliberation)간의 대립을 근간으로 발전하여 왔다(박선영, 2000, pp. 5∼32). 시장민주주의의 대변인격인 미국의 홈즈판사에 따르면, 공익성이 란 시청자들의 취향과 선호를 합한 것이므로 시장에서 가장 많이 소비되는 프로그램이 ‘공익적’이라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따라서 외부세력의 간섭이나 개입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화자나 청자의 자율성을 최대한으로 보장하는 방송정책을 통해 방송의 공익성을 실현시킬 수 있다고 본다.
한편 제임스 메디슨(James Madison)의 공적 숙의론에 의하면, 시민들이 숙의과정을 거치지 않은 한 시장에서 다수가 선택한 결정이 반드시 공익을 보장한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제대로 기능하는 민주주의라면 식견있는 시민들이 참여하는 합리적 토론과정이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방송은 다양한 의견을 제공해야 할 의무를 지닌다고 본다. 이런 관점에서는 정부의 내용규제가 숙의의 핵심조건인 의견의 다양성 증진을 위한 것이라면 언론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니라는 평가를 내린다. 즉, 다양한 의견의 유통이라는 공익을 고려하여 방송내용을 규제하는 것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숙의민주주의자들이 시장을 무용지물로 격하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시장실패의 필연성을 감안하여 정부가 나서서 공적인 숙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언론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방송 공익성을 숙의민주주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규제정책은 방송내용의 다양성 증진을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으로 삼고 있다. 1960년 미국의 FCC가 발간한 프로그램 정책보고서에서는 공익을 충족하는 프로그램의 유형을 1 4가지로 분류하면서 방송사들이 자율적으로 이런 유형들의 프로그램을 방영할 것을 권장하였다.4) 여기에서는 오락과 스포츠 등 상업성이 강한 프로그램도 포함되었지만, 기본적으로 주변적이거나 소외된 계층의 관심사나 소수의견을 담아내는 프로그램이 공익성의 핵심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숙의민주주의의 관점을 대폭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이미 앞에서 언급한 Red Lion 방송사와 FCC간의 송사판결에서 보듯이 형평성의 원칙(Fairness Doctrine)을 비교적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이 원칙의 준수가 방송채널 재허가 심사시 가장 중요한 평가기준으로 등장하기도 하였다. 공적 숙의론에 입각하여 정부의 케이블 방송규제에 정당성을 부여한 사례로는 케이블채널방송사인 터너사가 의무전송원칙과 관련하여 FCC에 소송을 제기한 사건을 들 수 있다. 연방대법원은 정부가 시청자의 접근권을 보장하기 위해서 케이블방송을 규제할 수 있다고 판시하면서 의무전송은 시청자들의 접근권을 인정할 뿐 아니라 의견의 다양성을 증진한다는 점을 명시하였다(박선영, 2000,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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