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國 自動車 廣告寫眞의 變遷에 관한 硏究

車正煥(中央大學校 新聞放送大學院 映像媒體專攻 )

I. 서 론

1. 문제 제기 및 연구목적

자동차 공업은 높은 기술 수준을 필요로 하는 한편 자동차를 구성하고 있는 각종 부품의 생산에서부터 완성차 조립까지 수 많은 공정단계별로 이루어지는 자본 및 기술집약적인 종합기계공업일 뿐만 아니라 관련산업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크고 고부가가치산업으로서 수출산업의 중핵이 되는 전략산업이며 공업선진화를 이룩하기 위한 필수산업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자동차 수출은 1988년에는 총수출액의 5.9%인 36억달러를 수출하였고, 2천년대에는 10%를 넘을 것으로 보여 향후 자동차공업은 우리나라 주종수출산업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자동차가 본격적으르 생산되기 시작한 것은 1962년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후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어 1990년에는 1,321,630대를 생산함으로서 세계 10대 자동차생산국이 되었고 1991년에는 전년에 비해 13% 증가한 1,497,818대를 생산하였다. 이를 차종별로 보면 승용차가 1,128,783대, 지프가 29,083대, 버스 105.713대, 트럭 205.777대, 특장차 28,083대로 나타났고 업체별로는 현대정공(주)과 대우조선공업(주)이 새로이 승용차 메이커로 탄생한 가운데 현대자동차가 768,090대, 대우자동차가 203,792대, 아시아가 28,020대, 쌍용이 24,663대, 대우조선이 44,251대, 현대정공이 3,006대로 나타났다.1)

우리나라의 자동차산업은 독자기술력의 부족, 세계자동차시장의 경쟁 격화 등 국내외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기술력제고, 생산성향상 등을 통해 성숙단계의 산업으로 발전시켜 경제성장의 주도적 역할을 지속적으로 담당하여야 할 산업이다. 2000년에는 자동차 생산이 1990년보다 2.4배 증가된 3,200,000대에 달하고 내수는 2.1배 증가된 2,000,000대, 수출은 3, 5배 증가된 1,200,000대에 달할것으로 전망된다.2)

그러나 자동차산업이 계속 성장하기 위해서는 양적인 증대만으로는 불가능하며 기술혁신에 의한 자동차의 질적 향상과 함께 생산되는 자동차를 효과적으로 판매할 수 있어야 한다. 자동차 판매에는 여러가지 마케팅 믹스(Marketing Mix)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짧은 시간안에 적은 비용으로 많은 잠재소비자들에게 자동차 구매의욕을 갖게 하는 것은 광고라고 할 수 있다. 자동차를 광고하는 방법으로는 크게 소비자들의 청각에만 소구하는- 라디오 방송광고와 시청각적으로 소구하는 TV광고처럼 전파매체를 이용한 광고와 신문, 잡지, 팜플랫과 같은 인쇄매체를 이용한 광고를 들 수 있는데 1991년 우리나라의 총광고비 2,115,764,029,000원중 자동차와 같은 수송 기기 부문의 광고비는 56,206,269,000원으로 2.7%를 차지하고 있으며 총광고비중 신문매체의 광고비는 1,243,898,467,000원인데 이중 자동차 광고는 38,419,219,000원으로 3, 1%를 차지하고 있다.3)

우리나라 자동차업계들은 이렁게 많은 광고비를 신문광고에 지불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더욱 효과적인가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에 거의 투자를 해오지 않았다. 본 논문에서는 특히 자동차광고에 있어서 사진이 차지하는 비중과 자동차 광고 사진이 소비자들의 욕구 변화에 따라 어떵게 변화되어 왔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 연구 문제

한국 광고의 발달과 함께 자동차 광고 사진의 발달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당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배경을 면밀하게 파악하는 것이 필요하다.

첫째, 우리나라 자동차 광고에 있어서 시대별, 사건별로 중요한 특징은 무엇인가?

둘째, 자동차 광고 사진의 내용(그림이나 카피)이 이러한 시대 상황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었는가? 이상과 같은 연구 문제들에 대해 역사적으로 고찰 함으로써 우리나라의 자동차 광고 사진의 변화 추세와 발전을 전망해보려고 한다.

3. 연구 방법 및 범위

본 연구는 문헌을 통한 역사적 연구 방법을 사용하였으므로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자동차가 도입된 이래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자동차 광고 사진의 변천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하기 위해 여러 문헌에 나타난 초기의 자동차 광고 사진과 특히 우리나라 전국지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신문들 중의 하나인 동아일보에 실렸던 자동차 광고 사진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자동차 광고 사진의 변천을 역사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II. 문헌 연구

1. 자동차 광고사진의 이론적 배경

1) 시각 매체로서의 신문 광고 사진

(1) 광고매체로서 신문의 특성

신문이 광고 매체로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4)

첫째, 배포영역이 넓은 廣範成을 지니고 있다.

신문에는 그 배포되는 영역에 따라 전국지, 지방지가 있으나 전국지인 경우에는 배포영역coverage이 전국적이라서 설득과 이해가 요구되는 신제품의 광고 활동에 매우 좋은 매체이다. 지방지는 그 지구 전역에 걸쳐서 독자를 가지고 있을 것이므로, 특정시장이나 그 지방 또는 지구광고전을 하는데는 많이 이용된다.

둘째, 신문은 대중에 대하여 뉴우스원으로서 公器的 성격을 갖는다.

이 공기성 때문에 독자로부터 받는 신뢰감이 커서, 자사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얻으려고 하는 기업광고의 매체로서 적절하다.

세째, 신문은 우리들 각계각층의 생활에 정기적으로 확실히 도달된다.

네째, 융통성이 크다.

잡지 광고나 TV의 FC(film commercial)에 비하면 그 때에 알맞는 광고 원고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시간적 융통성이 크다.

다섯째, 적시성 또는 즉시성이 있다.

그날 신문은 그날 중으로 읽혀지게 되므로, 시장을 구성하는 현재 고객이 나 잠재 고객에 대하여 시기적으로 적합한 광고를 할 수 있으며, 그 전달은 즉시 이루어진다. 그리고 읽혀지는 시간이 같다. 즉 조간은 아침에 석간은 밤에 읽혀 진다.

여섯째, 언제든지 읽고 싶을 때 반복해서 어떤 신문이라도 읽을 수 있다.

일곱번째, 효과의 반응이 빨리 일어난다.

신문은 광범위하게 그리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므로 그 반응은 곧 나타난다.

여덟번째, 단위 광고비가 싸다.

신문은 그 발행부수가 많으므로 서클레이션circulation 1부당 광고비는 싸다.

아홉번째, 색인쇄가 가능하다.

열번째, 신문은 마아케팅 활동을 원조한다.

1) 업계나 소비자 조사에 도움을 준다.

2) 판매원의 방문경로설정에 도움을 준다.

3) 판매원의 접객활동에 도움을 준다.

4) 판매점에 대한 우송용 자료가 된다.

5) 판매점이나 소매점에 어떤 접촉을 유지하는데 도움을 준다.

신문광고의 종류는 그 형태로 보아 편집광고(news광고)와 고지광고의 둘로 나눌 수 있다.

i ) 편집광고

편집광고는 "그 정체를 밝히지 않으려는 광고"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 있다.

편집광고는 항상 신문의 보도기사를 구성하고 있는 문장과 얼핏보아 구별할 수 없는 문장으로 되어 있다. 편집광고의 목적은 독자를 유인하여 그 기사를 읽히되 최후까지 읽지 않으면 설정된 함정을 감지할 수 없게 하는데 있다. 편집광고는 대략 3가지 형식을 갖고 있다.

(i) 전면적으로 擺裝된 편집광고

한마디도 추구하는 목적을 표면화하지 않는다.

금융면 시황의 광고 등은 그 좋은 예이다. 증권거래소의 객관적 검토라는 구실하에 특정주를 설명할 때, 또 출판사의 광고에 있어서 특히 신간소개와 같은 형식을 취할 때 그러하다. 자동차 기사를 적당히 매수하여 신형차에 관하여 쓰게 하는 것도 이 종류의 하나이다.

이때는 상표의 명시가 없으면 광고효과는 적고 그렇게 하면 독자는 곧 그 함정을 감지하게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신문제도에서는 전면적으로 의장된 광고는 금지 되고 있으며 법률은 적어도 광고의 출처를 기사의 말미에 <‥‥통신>등으로 표시 하게 되어 있다

(ii) 기록적이면서도 의장하지 않는 것

이것은 어떤 기업이 그 製法 製品 使用法등에 관하여 자료를 대중에게 제공하고 이 보도의 출처는 그 기업자신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이것은 독자가 광고란 것을 미리 감지하고 관심이 희박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있으나 이 선입견 은 편집자의 수완에 따라 어느 정도 해소시킬 수 있다. 집단광고에는 왕왕 이와 같은 기록적 기사가 사용되고 있다.

(iii) 경탄 기사

광고자가 놀람을 가지고 그 광고를 읽히도록 하기 위해서 비교적 짧은 문장에 일상적이면서도 센세이셔날한 보도의 實裁를 주는 것이다. 그러나 독자는 數回 그에 끌려 자극될지 모르나 그것이 계속되면 실증을 갖게 될 것이니 최고의 수완을 가진 편집자를 사용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리한 영향을 초래할지 모른다. ii) 고지

광고 신문의 고지는 광고자의 이름을 감추려 하지 않으며 문자 그대로 광고이다. 고지는 신문기사와 명백히 구별되어 있다. 특히 공급자와 수요자를 결부시키는 小告知는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 의하여 즉시 발견되는 것이니, 표현상 아무런 기교도 필요없고 다만 대소 어느 정도의 활자를 사용할까 하는 문제뿐이다. 신문고지의 요금은 장소에 따라 상이했으나 금일에는 단일 광고료 경향이 보이며 장소 지정에는 할증이 붙게 되어 있다. 고지의 면적은 행과 단으로 계산된다.

일본의 신문광고는 고지란(광고란)과 소고지란으로 되어 있다. 보통 광고는 각부의 하4단에 자리잡고 있으나 때에 따라서는 전 page광고도 대백화점 maker등에 의하여 행해진다.

소고지란은 <x x 안내>의 형식으로 인사, 학교, 토지 가옥, 매매, 기선 출항등 일반으로 작성된 광고이다.5)

이외에도 광고의 종류는 그 위치를 중심으로 하여 다음과 같이 분류되기도 한다.

營業物: 보통의 광고로써 대개 기사밑에 두는 것으로 통칭 보통물이라 한다. 도서, 약품, 화장품, 식료 및 기호품, 영화, 금융, 보험 그 밖의 각 종 영업광고를 가르킨다.

臨時物: 일반적으로 회사물이라 하여 결산 기타 임시로 게재하는 것으로 그 요금은 보통것보다 고가이다. 결산,. 행사, 법정공고, 모집, 분실, 사망등 그때만의 일시적 광고이다.

題號下: 신문 제자의 바로 아래에 있는 것으로 규격은 3Cm 2단이다.

記事中: 기사의 중간에 끼어 넣는 광고로서 규격은 7Cm 1단이다.

小說橫: 연재 소설란의 좌 또는 우에 붙어 있는 것이다.

榮出: 광고란에 가까운 기사중에 든 광고로 주로 좌우 양단 및 공고한 상부에 있다. 규격은 5.25Cm 1단, 3.5Cm 2단, 1.75Cm 2단이다.

聯合: 신문사나 대리점이 큰 공간을 취하여 그 가운데 몇몇 광고주를 연합시킨 것이다.

色刷: 주로 적색쇄가 사용되지만 가끔 황색과 녹색도 사용된다. 요금은 비싸다.

聯合廣告: 지방신문을 이용하는 경우 대리점이 5사 10사로 조합하여 제출하는 것으로 요금은 할인하는 것이 보통이다.

또 광고를 전국적인 것과 지방적인 것과로 갈라 전자를 전국광고 후자를 지방광고라 하는데 전자는 전국적 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로서 전국지에 게재된다. 후자는 특정시장을 대상으로 하는 광고로서 사용매체도 지방지가 사용된다.6)

(2) 광고사진의 기능

사진은 여러가지 의미를 가지고 인쇄물에 이용되지만 문장이 가지는 기능은 대개 추상적, 관념적 표현을 즐겨한다.

가령 사람의 얼굴 모습을 아무리 훌륭한 문장으로 표현하였더라도 독자의 주관에 의해 받아들이는 조건이 달라진다. 따라서 그와 같은 문장이 있을때 "이런 얼굴이다"로 사진을 보이면 어떤 명문보다도 구체적인 증거를 보는 사람에게 직접 평등하게 줄 수 있다. 이것은 시각전달의장에 있어서 사진만이 가지는 가장 훌륭한 능력이다.7)

기업은 상품을 생산한다. 그러나 소비자는 그 생산품을 하나하나 손에 잡고 살필만한 기회의 혜택을 받고 있지 않다. 많은 소비자에 대하여 그 상품과 개인적으로 접촉시키는 수단은 사진이 가장 편리한 방법이다. 구미 각국에서는 교통 사정, 소매점의 혼잡, 폐점시간이 이르다는 등의 이유로 통신판매가 늘어나고 있다. 더우기 메이커가 대기업화이거나 특정한 상표가 붙어 있는 상품이면 품질은 믿을 수 있다고 보는 경향이 점점 더해가고 있다. 미국에서는 소비자의 3할이 통신판매회사의 고객이라고 한다. 이렇게 되면 카달로그나 팜플렛은 세일즈맨의 구실을 하게 된다. 그리고 상품사진은 기업과 소비자를 연결하는 중요한 수단이 되기도 한다.8)

광고사진의 목적은 아이캐처(Eye-Catcher)와 설명이다. 아이캐처는 광고매체 즉 신문등에 게재되는 경우 우선 독자들의 눈에 띄지 않으면 안되므로, 사람의 눈에 띄게 하려면 광고사진 촬영시 광고물의 재료에 따라 표면의 느낌이나 질감, 양감등을 잘 표현하는 것이며 설명의 구실은 도해의 사용과 같이 문자로 표현하는 것보다 구조나 질감 사용 상황을 명백히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9)

(3) 신문광고와 광고사진과의 관계

신문에 사진이 실린다는 것은 참으로 중대한 현상이다. 그것은 대중의 보는 눈을 변화시킨다. 예전에 일반인들은 바로 자기가 사는 이웃의 거리나 마을에서 일어나는 사건들만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사진이 나타남으로써 세계를 향한 창이 열린 것이다. 공적인물들의, 모습 자기나라 또는 외국의 일들이 친숙해졌다. 시야가 넓어짐에 따라 세계는 축소되었다. 글로 쓰여진 단어는 추상적 이지만 영상은 누구나 볼 수 있는 세계를 구체적으로 반영한다.10)

신문광고가 마치 중국 신문의 광고문처럼 한자만 시꺼멓게 늘어 있거나 또는 내용도 난해한 광고를 보면 흥미를 잃게 된다. 아무리 쉽게 썼더라도 차분히 시간을 내어 모든 내용을 읽어 줄것을 독자에게 기대할 수 없다. 대강 전체적인 것을 보다가 재미있는 듯한 데만 이것저것 읽다가 끝나버린다. 일반적으로 독자들이 신문을 어떻게 읽는가를 살펴보면 우선 흥미와 관심도의 중심으로 이끌려진 다.11)

신문은 몇 면이건 엄연히 뼈대가 있어서 그것에 의하여 편집된다. 신문의 기사조차 몇 퍼센트를 읽는지 의문인데 과연 광고를 얼마나 읽어 줄지는 궁금한 일이다. 이런 독자가 어떤 광고에 주의를 기울일 것인가를 생각해 보면 역시 일러스트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그림을 보고 설명없이도 시각적으로 금방 알 수 있는 것, 즉 시각언어로써의 사고방식이 중요하다.

시각언어에는 문법이 없다. 말이 아닌 형태로써의 표현은 조형심리뿐 아니라 색채심리도 마찬가지로 중요하다. 특히 요사이는 컬러신문광고가 많이 이용되고 있다. 조형적인 프로그램 색채구성외에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사물의 즉물적 내용 의 종합이다. 광고사진에서는 사람을 모델로 사용하느냐 동물을 사용하느냐 풍경 을 이용하느냐, 그림을 이용하느냐를 선택하여야 하며 또 어떤 분위기를 만들 것인지가 문제이므로 광고사진작가는 그 목적에 따라 구상하여 효과적인 광고사진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효과적이고 독창적인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해야 한다.12)

i) 이상형을 생각한다.

어떤 것을 표현하고 싶은가 하는 구체적인 조건을 파악하는 일이다.

ii) 조건을 정리하여 허점을 발견한다.

구체적인 조건을 하나하나 검토해 보고 무엇이 부족한지 무엇을 개량하면 좋은지를 한번 살펴보는 일이 그 첫걸음이 된다.

iii) 현실의 효과를 생각한다. 광고사진은 발표한 이틑날이나 다음달에는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때의 실용성을 가진 것이 아니면 안된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조건에서 대중에게 이해될 만한 충분한 소구를 갖고 있는지의 여부를 냉정히 객관적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안된다.

iv) 선입관을 버린다.

창조성을 가지려면 넓은 시야를 갖고 선입관을 버려야 한다. 13)

(4) 일러스트레이션과 광고사진14)

현대인은 분주하고 기계화된 사회 속에서 대량으로 쏟아져 나오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모든 것을 단순화하고 강하게 직접적으로 획득될 수 있는 것을 갈구하고 있다. 그리하여 머리로서 이성적으로 이해하고 사고하기 보다는 육감적으로 느껴오는 감각적 파악으로 일체감을 체험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강력한 충격으로 사람의 시각에 작용하여 마음속에 강한 이미지를 남기게 하는 수단으로 일러스트레이션은 상당한 힘을 지니고 있다. 일러스트레이션의 정확한 사전적 의미는 "설명도, 도해, 해설, 예증"등의 의 미가 있다. 그러나 현대적 의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어떤 목적을 위한 설명도인 것임은 물론 동시에 그림인 것이어야 하는 것이다.15)

이러한 현대적 의미의 일러스트레이션은 과거에는 보통 삽화로 번역되어 졌지만, 원래의 뜻은 회화적 구도의 특징을 가지는 실물에 대한,설명을 의미하였으며, 또한 종래에는 그림 내지 회화라고 하면 대개의 경우 미술가(Fine Artist)가 그린 원화만을 의미하였던 이유로 삽화라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러나 오늘날 새로운 예술의 한 장르를 형성한 사진예술이 광고에 도입되어 실물에 대한 설명, 즉 종래의 삽화가 수행해 오던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부터 삽화라는 말 대신에 원어 그대로 일러스트레이션이라고 불리워졌으나16) 이는 사진의 도입에 의한 단순히 사용상의 변화라기 보다는 시대적 요구에 따른 일러스트레이션의 사용과 내용상의 개념의 확대로 삽화나 컷이라는 말로는 만족되지 않은 적극적인 표현에 그 이유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광고사진은 미학적 판단에 의해 평가되어서는 안되며, 광고하려는 내용과 얼마나 잘 조화 또는 일치하느냐 하는 것과, 광고 수용자의 주의를 얼마나 지속시킬 수 있으며, 얼마나 매력을 주어 어느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게 하느냐 여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하는 것이다.

(5)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 광고사진의 요건과 기능

모든 형태의 예술은 주관적이든 객관적이든 누구에게인가 보여지게 되는 것이다. 보는 사람이 없는 미술작품이란 어떤 의미에서든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우기 순수미술이 아닌 광고사진과 같은 대중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매체의 경우에서는 일반 대중 내지는 소비자란 피할 수 없는 대상이다.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 분야는 주관적이고 정신적인, 다분히 자기 본위적인 요소가 있으나, 광고사진의 경우에서는 항상 일반 대중과 소비자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다. 순수회화는 형이상학적 사고의 표현에 작품의 제작 동기가 있기에 주관적이고 독선적인 면을 양해할 수 있겠으나, 광고사진의 경우에서는 애초 작픔 의 제작 동기가 이미지 내지는 메시지의 효과적 전달에 있으므로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특히 광고사진의 경우에 있어서의 조형적 의미에는, 어떠한 기능으로 어떤 용도에 무엇을 전달할 것인가 하는 사용 목적과 기능에 수반되는 전제가 있기 때문에 객관성에 대한 요구가 더욱 강조되는 것이다.

더우기 광고의 목적이 대중으로 하여금 상품이나 서비스를 구매하도록 하거나 특정 지워진 관념이나 단체 또는 개인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하거나, 혹은 그러한 정보를 제공하여 영향을 끼치려는 의도하에서 일반 대중에게 시각적 또는 구두의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려는 목적이 있기에17) 광고사진은 광고의 이러한 의도의 광고메시지를 전달함에 있어 광고의 의도에 대한 정확한 파악과 이해하에 광고의 목적과 자신의 개성을 잘 융화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광고사진가는 전달하고자 하는 목적에 적합한 메시지를 다양한 표현 방법을 사용하여 정확히 표현하여 일반 대중에게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광고 일러스트레이션으로서 광고사진이 어떠한 기능을 수행하는가를 살펴보면,18)

i) 주위 집중의 효과를 가진다.

ii) 광고메시지가 약속하는 혜택에 대한 이해를 쉽게 한다.

iii) 제품과 포장을 식별할 수 있게 한다.

iv) 광고아이디어를 신속하고 명확하게 전달해 줌으로써 문안을 짧게 만들 수 있게 하여 그것을 읽게끔 유도한다.

v) 광고물의 격조 내지 분위기에 영향을 미치므로 소비자의 기분 또는 무드에 영향을 끼친다.

vi) 광고를 보다 적극적으로 만들어 주어 기억을 하기 쉽게 한다.

vii) 문안만으로 나타낼 수 없는 풍물이나 자연경관을 직접적으로 나타낼 수 있다.

2.자동차 광고에 관한 선행연구

국내에서 발표된 자동차 광고에 관한 학술적인 선행연구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으며 가장 학술적인 논문으로는 수원대학교 정만수 교수의 "광고메시지와 소비자인식에 관한 연구:인쇄광고를 중심으로" 정도이므로 그 내용을 고찰해보기로 한다.19)

인쇄광고는 일반적으로 글정보(Factual Information)와 그림정보(Pictorial Information)를 함께 지니고 있다. 그리고 광고의 전체이미지(Total Image)는 글의 강도(StrenBth of Argument) 및 그림의 매력도(Attractiveness of Picture)에 따라 달라지며, 광고전체에 내재한 제요소들의 배열상태(Layout)에 의해서도 큰 영향을 받는다. 그런데 학자에 따라서는 글정보와 그림정보의 중요성에 대해서 상이한 의견을 보여주고 있으나 Tsal의 견해에 따르면 비록 고관여상품일지라도 그림정보의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한다. 즉 Tsal의 주장이 광고물 전체를 평가할 때 보다 합리적이다.20)

일반적으로 강력한 글정보와 매력적인 그림정보를 가진 광고가 그렁지 못한 광고에 비해서 보다 긍정적인 상표인지를 가겨온다고 한다. 그러면 같은 그림정보를 가진 두 개의 광고가 있을 때, 어떤 문안(Copy)를 가진 것이 더 효과적일까?

광고를 분류하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지만, Snyder매 따르면, 품질을 중시한 광고(Product-quality-oriented Ad)와 이미지를 중시한 광고( Image-oriented Ad)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즉-품질을 중시한 광고는 상품이 지닌 품질의 우수성, 좋은 성능. 훌륭한 미각(Excellent Taste)등을 직접적으로 표현하는 반면, 이미지를 중시한 광고는 그 제품을 사용함으로써 얻어지는 장점이나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현저한 시각효과를 자주 사용한다.21)

품질을 중시한 광고와 이미지를 중시한 광고중에서 어느 것이 효과적일까를 검증하기 위해 정만수교수는 자동차광고를 택했다. 그러나 이 연구는 미국에서 실시된 것이므로22) 연구결과는 사회, 문화, 경제적 환경이 다른 우리나라에서는 자동차에 대한 인식이나 광고를 대하는 소비자의 태도등에도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정만수교수는 대중 승용차를 가진 사람은 자동차가 지닌 교통수단으로서의 기능적인 면을 강조하며 자신과의 동일성(Identities)은 연결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으며, 이에 비해 고급승용차를 가진 사람은 자동차가 나타내는 지위상징기능이나 사회경제적인 동일성을 보다 강하게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첫번째 연구가설을 도출하였다. 즉,

Hi : 대중승용차 광고에는 품질을 중시하는 메시지가 이미지를 중시하는 메시지보다 더욱 설득적이다. 반면 고급승용차 광고에는 이미지를 중시하는 메시지가 품질을 중시하는 메시지보다 더욱 영향력이 클 것이다.

가족내 역할이론과 연계시켜볼때 자동차 구매시 남편은 기능적 역할에 해당하는 구매시기, 예산, 제조회사. 구매장소 등에, 아내는 표현적 역할인 모델, 색깔, 선택사양 등의 결정에 보다 많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가정하에 두번째 연구가설을 도출하였다.

H2 : 자동차 구매시 남편은 기능적 역할과 관련된 구매시기, 예산, 제조회사 및 구매장소의 결정에, 그리고 아내는 표현적 역할과 관련된 모델, 색깔, 선택사양의 결정에 보다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인식욕구와 광고메시지의 형태, 특히 Copy 내용과의 관계를 살펴볼 때, 인식 욕구가 높은 사람일수록 주어진 메시지를 더욱 활발하게 추구하므로, 막연하게 이미지를 강조하는 Copy보다는 품질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받기를 원할 가능성이 더욱 높다. 이러한 가정을 바탕으로 인식욕구와 광고메시지와의 관계를 설정하는 세번째 연구가설이 다음과 같이 도출되었다.

H3 : 인식욕구가 높은 사람일수록 품질을 중시한 광고메시지를 더욱 효과적인 것으로 생각하며, 인식욕구가 낮은 사람일수록 이미지를 중시한 광고 메시지를 더욱 호의적으로 생각할 것이다.

인식욕구는 매체노출과도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고 보여진다. 더우기 각종 매체는 광고를 담아 전하는 용기로 볼 수 있으므로, 매체의 접촉에 대한 연구는 광고의 인식에 있어서 중요한 기초자료가 된다. 따라서 마지막 연구가설은 인식욕구와 매체노출(Media Expdsure), 특히 인쇄매체에 대한 노출량과의 관계를 긍정 적인 상관관계로 표시한다

H4 : 인식욕구가 높은 사람일수록 보다 많은 신문과 잡지에 노출한다.

이러한 가설들에 대한 검증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즉, 이 연구는 광고메시지 특히 카피의 내용이 전체 광고물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카피의 내용을 품질을 중시하는 것과 이미지를 중시 하는 것으로 구분하였고, 이와 더불어 제품자체가 갖는 속성을 고려하여 대중승용차광고와 고급승용차광고를 선택하였다. 한편 광고를 평가하는 주체인 소비자의 속성 가운데, 인식욕구와 성별역할을 변인으로 하여, 광고인식에 있어서 소비자의 선유경향을 분석하였다. 즉 광고의 인식에 있어서 세 주체라 할 수 있는 소비자, 광고물 및 광고하려는 제품간의 상호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소비자의 정보 추구행동을 체계적으로 관찰하려고 시도하였다.

이 연구에 사용된 제품인 자동차는 가정에 있어서 주택을 제외하고는 가장 고가품이며, 가족구성원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상품이다. 따라서 새차를 구매할 때는 가족구성원, 그중에서도 남편과 아내의 정보추구행동과 의사결정 과정이 특히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연구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직접면접법이 사용되었고. 약 300명의 응답자로부터 받은 설문지 가운데 유효한 263부를 분석대상으로 삼았다.

좀 더 구체적으로 이 연구에서는 위의 4개의 가설이 설정되어, 그 중 세개는 가설이 입중되었고 한개는 부정되었다.

Hl은 광고메시지와 소비자의 태도를 연구대상으로 삼았으며 받아들여졌다. 즉 대중승용차 광고에는 품질을 중시하는 카피가 이미지를 중시하는 카피에 비해 다소 높은 영향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고급승용차의 광고에는 이미지를 강조한 카피가 품질을 강조한 카피에 비해 월씬 큰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

두번째 가설 H2는 성별역할이 제품의 구매행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것을 연구문제론 삼았으며,. H2는 받아들여졌다. 가설검증의 결과를 요약하면, 자동차란 특정제품을 놓고 볼때. 남편은 기능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는 구매시기, 예산, 제조회사 및 구매장소 등의 결정에 강한 영향력을 보여주는 반면, 아내는 표현적 역할이라 할 수 있는 모델. 색깔 선택사양의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 하는 경향이 있다.

세번째 가설 H3는 인식욕구가 광고의 카피를 인식하는데 어떤 작용을 할 것 인가에 대한 문제를 검토하였으나, H3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즉 인식욕구가 높은 사람일수록 품질을 중시한_광고를 더욱 호의적으로 받아들이며. 인식욕구가 낮은 사람일수록 이미지를 강조한 카피를 더옥 호의적으로 받아들인다는 H3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한 상호작용효과를 발견하지 못했다.

마지막 가설 H4는 인식욕구와 매체노출이 갖는 상호관계를 고찰함으로써, 광고를 담고 있는 그룻인 매체자체에 대한 기본자료를 분석해 보려는 시도를 하였다. 특히 이 연구에서는 인쇄매체를 중심으로 살펴보았으며. H4는 받아 들여졌다. 즉 인식욕구가 높은 사람일수록 인쇄매체에 대해 보다 활발한 노출을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인식욕구가 높은 사람일수록 보다 많은 수의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는 경향이 있다.

가설검증 외에도 몇가지 중요한 결과들이 서술적 분석과 사후분석을 통해 얻어졌다. 그 가운데 몇가지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인식욕구가 높은 사람은 주어진 설득메시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그리고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며, 어떤 결정을 내리기 전에 충분한 정보에 대해 검토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인식욕구가 낮은 사람은 주어진 설득메시지를 보다 쉽게 받아 들이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결과를 놓고 볼 때. 인식욕구가 높은 사람일수록 상품을 구매할 때 보다 많은 판매장을 방문하며, 매체나 다른 개인으로 부터 보다 많은 상품정보를 수집하는 경향이 있다.

둘째, 자동차 구매시 주로 고려하는 사항들은 (1)안정성 (2)예산 (3)연비 (4)제조회사 (5)편안함 (6)가족의 수 (7)차종 (8)모델 (9)지불조건 및 (10)모양 등이다. 그리고 자동차 구매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인구통계학적인 변인은 가족의 수입, 나이, 교육수준, 성별, 부부의 취업여부, 직업, 가족의 수 등이다.

세째, 자동차 구매시 필요한 상품정보는 (1)각종 소비자 보고서 (2)친구 (3) 배우자 (4)정비기술자 (5)판매원 (6)텔레비젼 광고 (7)잡지광고 (8)친척 및 친지들 (9)사교집단 (10)이웃사람들로 부터 폭넓게 받아 들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마지막으로 한편의 광고물은 거기에 내재한 제요소들이 만들어내는 총체적인 이미지로 평가되며, 이러한-요소들 가운데는 카피의 설득성, 그림의 매력도. Layout의 우수성, 광고에 담긴 정보의 양 등을 들 수 있다.

이 연구는 광고의 인식에 있어서 삼주체인 소비자, 광고 및 상품의 상호관계를 규명함으로써, 소비자의 정보추구행동을 체계적으로 분석하려고 시도한 점에서 그 의의를 찾을 수 있겠으나, 이 연구가 안고 있는 제한점을 몇가지 기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 연구는 비교적 여러 변인들을 분석해 포함시키고자 노력하였으나, 구매행동과 이에 상응하는 의사결정과정은 매우 복잡하기 때문에 결국 일부분만을 고찰하는데 불과하였다. 특히 자동차의 구매는 제품이 가진 특성이라 할 수 있는 고가품, 복잡한 기계장치, 다양한 차종, 광범위한 가격차 등이 혼합되어 있는데다, 자동차에 투영된 개인의 지위상징기능, 유행의식, 가치관 및 라이프스타일 등이 더욱 복잡한 의사결정과정을 거치게 한다.

둘째, 수 많은 차종 가운데 대표적인 대중승용차 한 대와 고급승용차 한 대가 선택되었다. 이는 현실적인 여러가지 제한으로 인한 부득이한 조치였으므로, 가능하다면 많은 차종을 연구대상으로 하는 것이 보다 유용한 결과를 얻을 것이다. 특히 편견을 배제하기 위해서 외국산 자동차는 선택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실제 상황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을 것이다.

세째, 이 연구는 응답자가 대답한 자료를 바탕으로 분석되었기 때문에 구조적인 제한점을 안고 있다. 많은 조사연구가 그렇듯이 응답자가 대답한 자료는, 그들이 실제 가지고 있는 의견이나 실제 행하는 행동과는 차이가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특히 이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자동차 구입시 많은 사람들이 비교적 논리적인 의사결정을 거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실제 자동차 제조회사나 광고담당자들은 소비자들이 감정적인 요인에 의해 구매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 한다. 즉 구매자가 자동차의 안정성이나 예산, 연비등을 염두에 두면서도. 모양과 스타일(Shape and Styling)등 우선 보기 좋고 멋지게 생긴 자동차 (Nice-looking cars)를 선택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따라서 이러한 한계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직접관찰법, Focus Group Interview 등 심층조사법이 병행되어야하며, 조사대상자도 일반소비자 뿐만 아니라 판매를 담당하는 영업사원이나 정비기술자등의 의견도 폭넓게 수용해야 할 것이다.

그외에도 원인관계(Cause-effect Relationship)는 살펴보지 못하고 일회성 실사(One-shoot Field Survey)에만 그쳤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을 포함하는 Panel Study나 Time Series Analysis 등을 병행하였다면 더욱 심층연구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사진의 매력도가 자동차광고에 있어서 중요한 변인이기때문에 흑백 사진 대신 칼라사진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실제적인 결과를 얻을 것이다. 이상의 것들이 정만수 교수가 밝히고 있는 이 연구의 제한점들이다.

111. 연구 방법 - 한국 자동차광고 사진의 시대적분석 -

본 연구에서는 우리나라 신문에 게재된 자동차 광고 사진이 우리나라의 시대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가를 역사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한다. 자동차 광고가 시대상을 어떻게 반영했는지 자동차 광고에 반영된 시대상을 알기 위해서 첫째, 자동차 광고의 시대적 사건별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했으며 둘째, 자동차 광고의 내용(그림이나 카피)이 시대 상황에 따라 어떻게 수용되었는가를 살펴보았고 세째, 전체적인 시대적 환경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우리나라 자동차산업의 숨겨진 이야기나 에피소드를 발굴 정리하였다. 특히 본 연구에서는 시대적 고찰을 근간으로 하고 당시 상황과 에피소드를 엮어 광고테마와의 연관관계를 찾고 그 의의를 하나씩 살펴보도록 하였다.

가장 오래된 신문광고

최근에 발견된 가장 오래된 신문광고는 1886년 2월 22일자의 주간 한성주보 (漢城周報) 제 4호에 게재된 독일상인이 경영하던 일용품수출입상 세창양행(世昌洋行)의 광고(자료 1)인데, 그 크기는 4 × 6 배판한 페이지가 조금 넘는 크기였다. 이 광고문은 「啓者本行今開在朝鮮..

貴客商買有此貨物不拘多衆槪行收買..」로 이어져서 사진이나 그림도 없이 모두 활자로 되어 있으므로 기사와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 광고에는 당시 세창양행이 주로 취급하던 虎皮, 馬皮, 染料 및 洋燈 등의 상품목록도 포함되고 있다. 따라서 이 광고는 告知를 목적으로 하는 신상품광고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23) 이런 광고가 나오기는 했으나, 정작 광고란 것을 이해하고 많이 이용하게 된 것은 10년후인 1896년에 徐 載弼이 미국에서 돌아와 독립신문을 발행한 뒤부터였다.

구한말에서부터 20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는 독립신문외에도 제국있었고, 또한 간판광고, 우편광고, 전단광고 등이 있었으며, 漢城廣告社라는 광고대행사도 있었다. 그러나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자 모든 일간신문이 없어지고, 그 무렵 가장 영향력이 크던 大韓每日新報는 조선 총독부의 기관지가 되어 버렸다. 따라서 국문 일간신문으로는 "大韓"이란 이름이 빠진 每日新報만이 남게 되었다 물론 일본어 신문은 많았다. 따라서 1920년 조선, 동아일보의 두 신문이 나오기까지 우리말 광고는 이 매일신보만을 유일한 매체로 계속되었다.24)

(1) 여 명 기 (1903-1945)

1903년은 조선 왕가에 있어 매우 뜻 깊은 한 해였다. 고종이 재위 40주년을 맞았기 때문이다. 그는 조선 역대 임금 중에서 가장 오랫동안 왕좌를 지켜왔던 것이다. 그러나 재위기간 중 고종만큼 내외적으로 풍파를 겪은 임금도 드물었다. 이러는 가운데 큰 병고없이 40년간 임금의 자리를 지켜 왔다는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어서 대신들이 뜻을 모아 큰 잔치를 베풀어 고종을 위로하려고 했던 것이다.

이 잔치를 이름하여 칭경식(稱慶式)이라 했는데 고종으로부터 어렵게 허락을 얻어낸 신하들은 고종을 광화문에 마려된 광무대라는 최초의 노천극장까지 차로 모시고 연회장까지 가려고 자동차 도입을 주청하게 되었다.25)

결국 초대 미국 전권공사였던 알렌의 도움으로 고종을 위한 어차를 한대 들여오기로 했는데 이 자동차는 비행기가 없던 시절이라 칭경식이 끝난지 몇 달 후에야 배에 실려 인천항에 도착했고, 다시 경인선 기차에 실려 서울 남대문 역에 내린후, 미국사람이 운전해 궁 안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마침 한강철교가 칭경식 1년 전인 1902년에 개통되어 노량진역에서 한강나루터의 쪽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수고는 면했던 것이다.26)

그러나 일반 대중들이 차를 접하고 이용하기에는 시간이 필요했다. 즉 처음에는 일부 왕족이나 대신, 외국 공사들만이 주로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00년대 우리나라의 철도와 도로 사정을 살펴보면 일제는 부산과 신의주를 관통하는 경부선과 경의선을 1904년에 완공, 군사목적의 철도부설로 장차 조선통치의 교두보를 마련했다. 한편 1907년 일제통감부가 전주-군산간 46km의 신작로를 닦아 조선의 곡창지대를 넘보았고, 동해안의 명태와 금강산을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서울-원산간의 경원선을 착공할 계획까지 세웠다. 또 일제는 1914 년 경원선이 완공되자 원산과 평강 두 곳에서 내금강까지 신작로를 뚫어 금강산 관광객 유치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강원도 도민들이 지역의 낙후된 교통사정을 해결하기 위해 총독부에 철도부설을 요구했지만 지세가 험하고 과다한 공사비, 기술미숙등을 이유로 계속 미뤄오다가 1928년에야 경춘가도를 개통하게 되었다. 1910년 후반부터 자동차의 편리성이 부각되자 일본, 중국의 자본가나 상인, 우리나라의 돈많은 계층에서 차를 수입해 들여와 택시영업을 시작했다. 이 당시에 주로 수입되던 차종은 미국의 "포드 T형"이었다. (자료 2) 도로건설이 늘어나자 자동차 운수업이 활기를 띠게 되고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났다.

1910년 7월 5일자 대한매일신보에 한성광고사(漢城廣告會)라는 광고가 게재 되었는데, 그 광고내용은 신문과 잡지에 내는 광고를 취급한다는 것이었다. 한일 합병 뒤인 1910년 9월과 11월 매일신보에는 부록으로 2페이지 광고가 있는데 한성광고사발기(漢城廣告會發起)라 씌어 있다, 다만, 실지 어떻게 광고업을 했는지는 밝혀 있지 않다. 모름지기, 한성광고사는 한국 광고대행업의 효시였던 듯하다. 한성광고사의 7월 6일자 광고와 7월 24일자 광고(자료 3)를 보면 애초에 외상사동(外相思洞)에서 서부무교동(西部蘿橋洞)으로 옮긴 것이 나타나 있다.27)

1919년의 3.1운동과 한일합방후 10년간의 무단정치의 중단, 그리고 이른바 문화정치로의 전환에 따라 1920년 봄에는 <조선, 동아일보> 두 신문이 창간되기에 이르렀다. . <조선><동아>의 양대신문중 <동아일보>는 "민족의 표현기관"으로 출발했다.

신문의 상업성은 2차적 중요성을 지니고 시작된 것이 근대 한국신문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동아일보>의 경우도 광고는 그리 중요시하지 않았다. 창간호인 1920년 4월 1일자 신문은 8면인데, 그 3면에는 신문지 구독료와 함께 광고료를 사고(社告)모양으로 게재했다. (자료 4) 48명의 사원 가운데는 사진부와 광고부에 있던 일본인 촉탁이 1명씩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 부문에 대해서는 일본인의 전문지식을 빌어야 했던 듯하다.28)

처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1면이 12단으로 되어 있고, 매일 4면을 발간했는데 5월부터는 제1면에 6-7단, 2면에는 2-3단, 3면에 3-4단, 4면에 6단의 광고가 게재되었다. 따라서, 오늘날과는 달리 면별(面別) 광고단수(廣告段數)와 면체재(面體裁)는 퍽 융통성이 있었다. 1925년에 이르러서는 이러한 신문면 체계가 상당히 바뀌어 1면에는 3단, 2,3면에는 2-6단, 4면에는 6-7단의 광고가 게재 되었다. 다만, 1면에도 이따금 6-7단의 광고가 실리기도 했으나 일러스트레이션이나 로고타입, 사진을 쓴 광고도 늘어났다.

1920년 4월 1일자 <동아일보> 창간호에 실린 광고 가운데 칠신환(七神丸)은 혹바탕에 희게 쓴 광고였다. 물론, 이러한 Reverse 방법은 구한말 신문에서는 흔히 쓰였다.29)

1920년대 초에 나타난 한국의 광고로서 특기한 만한 것은 조선매약주식회사 (朝鮮賣藥株式會社)와 화평당약방(和平堂藥房)간의 광고 캠페인이다. 조선매약의 영신환(靈神丸), 화평당은 자양환(滋陽丸)과 태양조경판(胎養調經丸)의 두 가지 약광고를 시리즈로 광고 했다. 두 약회사가 1922년 4월에 전개한 캠페인은 그 물량에 있어서 대단한 것이었고, 표현의 다양성, 기동성, 창의성 등에서 두드러진 것이었다. 양사의 캠페인은 경쟁이 치열했으며, 1일 4면 발행이던 그 당시 사회 면인 제 3면에 주로 광고를 게재한 것도 주목을을 노리는 의도였던 것이다.30)

최초의 자동차 광고

최초의 자동차광고라고 할 수 있는 것은 1920년대의 서울 화교재벌이었던 담정림이 당시 큰 라이벌인 한성택시를 제치기 위해 최고급차 "커닝햄"을 도입하고 그의 아들 담걸생이 역사상 처음으로 신문에다 광고를 게재 했다고 한다.

춘풍이 점차 화창한 시절에 여행이나 혹은 공원과 교외에서 신선한 공기를 흡수하시고 천연한 경색을 감상코자 하시는 신사 숙녀 제위께서는 미카도 자동차부의 미려 경쾌한 신식 고급자동차를 일차 필승하시 압‥‥ 전화본국 3433.31)

이 광고를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 광고라고 보지만 실제 게재된 광고는 찾을 수 없었다. 1920년 4월 2일자 동아일보에 "경남자동차상회"를 고지하는 광고(자료 6)와 5월 20일자에는 자동차빵꾸 방지액과 자동차 수리광고등이 보이고(자료 7) 그 후 1925년 동아일보에 차의 이름과 판매 내용등을 어느 정도 갖춘 포드자동차 광고가 실렸다. 따라서 문헌상 최초의 자동차 광고는 이 광고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자료 8)

자동차역사의 여명기라 할 수 있는 1903년부터 1954년 사이 자동차광고의 특징은 첫째, 제약광고의 경우에는 창의성이 다양하게 발휘되었으나 자동차광고는 단순고지 형태로 자동차 점포 개업을 알리는데 치중했다. 담걸생이 신문에 광고를 낸 것과 같이 문안이 아주 정중하고 예의 바른 어투였지만 자동차 매카니즘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보다는 이동 수단의 도구로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다.

둘째, 타 택시업체와 경쟁을 하기 위해 처음으로 광고를 이용했다는 점이다.

내용이나 디자인의 문제는 제외하더라도 광고를 통해 자동차의 출현을 알렸다는 점에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또 1925년 동아일보에 경성의 세일프레사주식회사가 낸 광고는 "진정부분품, 승합자동차 등을 구비하고 판매하니 주문하시면 고맙겠다"는 내용이다. 이 광고를 보면 미국 포드사의 로고를 상단에 표시하여 부품, 차량을 외국에서 그대로 수입해 왔던 자동차산업의 일면을 보여 준다.

셋째, 광고 전반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광고의 필요성에 대한 일반 국민들의 인식이 부족했고 매체, 인쇄법, 광고기법이 발달하지 못한 시기 였다.

넷째, 광고를 통해 당시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다.

1930년대에는 일본이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을 일으켜 극심한 가솔린 부족 현상이 일어나자 연료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목탄차를 개발했다. 이 목탄차는 조선 운송주식회사의 다께시마 사장이 수만원의 예산을 들여 일본 육군성에서 연구한 결과를 실용화한 것이다. 목판차는 운행 중 연기가 요란해 운전사와 조수는 새까만 얼굴로 다녀야 했고 소나기를 만나면 불이 꺼져 낭패를 당하기 일쑤였다. 이 목탄차는 오랜동안 이용되어 광복 직후 총 차량대수 7,326대중 자가용 승용차는 447대였고 목탄차, 카바이트차는 1,220대였다.

그러면 여명기의 자동차 광고를 정리해 보자. 1920년 봄에 창간된 조선, 동아 두 신문사에 광고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일본인 촉탁사원이 있었음은 이미 언급했다. 이들의 세련된 광고 제작 기법이 광복전까지 신문에 반영되고 있다. 동시대의 일본의 광고를 살펴보면 일러스트, 기사형광고, 섹스기법등이 우리나라 광고에도 나타난다.

1940년 2월, 6월, 8월 동아일보에는 동경 닛산자동차(주)의 광고가 실려있다. 3단 전면 크기의 이 승합차, 트럭광고는 일본의 후지산과 거리풍경을 섬세한 터치로 묘사하고 있는 점이 돋보인다. "닛산 트럭, 버스"라는 헤드라인을 먹 지문에 횐 글씨로 뽑아 주목률을 높이고자 한 혼적이 보인다.

(2) 태동기 (1945-68)

광복후 전쟁 전까지 고물차를 고치고, 진주했던 미군이 불하한 군용폐차 등 을 재생하여 1만 6천여대로 불어났던 자동차들이 전쟁으로 인해 약 80%에 해당하 는 1만 2천여대가 휴전회담이 시작되던 1951년 말 피해를 입으며 그나마 쓸만한 차는 거의 군에서 징발해 또다시 자동차교통이 전멸상태가 되었다. 정부는 이러한 후방의 자동차 교통을 해결하기 위해 1952년 원조자금을 이용하여 일본으로부터 880여대의 트럭과 버스를 들여와 숨을 쉬게 했다.

1953년 7월 정전협정으로 전쟁이 끌났을 때는 전쟁 중 불하한 군용폐차 재생 등으로 자동차는 늘어나 1만 3천여대가 되었다. GMC트럭은 버스와 민간용 트럭으로, 지프차는 천막 대신 드럼통을 펴서 만든 탑을 씌워 정객이나 VIP들의 자가용 승용차로, 4분의 3톤짜리 중형트럭인 스리쿼터는 합승택시로 개조되어 전시 중 후방의 민간교통을 담당했다. 6.25후 부산에서 교통난을 완화하기 위해 정부는 전시특례법을 만들어 합승 택시제도를 제정하면서부터 스리쿼터의 뼈대와 엔진 등 구동장치를 이용해 드럼 손님을 많이 통을 펴서 만든 6인승 왜건형 합승택시가 처음 나왔다. 얼마 안가 손님을 많이 태우기 위해 9-16인승 미니버스로 변해 시민교통의 주역이 되었다.

특히 충남 공주출신의 김창원씨는 부산으로 피난가서 신진공업사라는 정비업체를 세우고 2천여대의 합승버스를 만들어 당시 운수업자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기반을 다졌다. 수복후 서울까지 이 차가 보급되어 사람들은 이 차를 노랑머리에 푸른 눈을 가진 미국사람들의 차로 만들었고, 색깔이 노란색이어서 '노랑차'라고 불렀는데 서울에만 1960년경에는 900여대가 굴러다녔다.

1954년 정부는 전쟁 때 징발했던 민간트럭을 해제하고 군용트럭을 '후생차' 라는 이름으로 민간인들에게 대여하여 국민경제 유통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 전쟁 중 일본으로부터 군용트럭 등 1만여 대를 도입하여 전쟁을 치루었으나 우리의 자동차 공업은 6.25 때문에 기술적인 기반을 잡은 셈이 되었다. 전쟁이 끌나자 전국 2천여 곳의 노천 정비업소들이 천막을 쳐놓고 전쟁통에 쏟아져 나온 군용 폐차를 모아 망치로 드럼통을 펴서 가지각색의 버스, 트럭, 합승택시를 만드는 군용폐차 재생시대를 맞았다.32)

최초의 국산차 시발

자동차라고는 미군이 쓰다가 불하하거나 버린 지프차, GMC트럭 등이 전부였던 당시의 악조건 속에서도 그야말로 자동차생산에 열을 올리며 무에서 유를 창조하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다름아닌 최초의 자동차인 시발차를 생산한 최무성씨, 동아자동차(주)의 모체인 하동환자동차공업의 하동환씨, 기아산업의 전 신인 경성정공(주)을 설립한 김철호씨, 신진자동차의 김제원, 창원 형제와 1943년 현대의 모태인 아도서비스를 설립하여 자동차정비업을 하던 정주영씨 등 이다. 아도서비스는 1950년 현대자동차공업사로 이름을 바꾼 후 현대토건사와 합병, 건설회사로 발돋움하기 시작했고, 1967년 현대자동차공업(주)의 설립으로 열매를 맺게 된다.

최초의 국산자동차인 시발(始發)을 만들어 냈던 최무성씨는 서울 종로 가회동의 부잣집 6남매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경신중학교 2학년 때 반일운동에 가담 했다가 퇴교 당한 후 동경의 아까사까중학교와 전수대학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귀국 후 한성전기 주식회사에 근무하기도 했고 조선중앙일보 사회부 기자가 되었으나 1937년 11월 조선중앙일보가 강제로 폐간되면서 직장을 잃고 지하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광복을 맞이했다.

1946년 8월 무성, 혜성, 순성 3형제는 서울 을지로 2가에 "국제공업사"라는 정비공장을 차리고 무성씨가 사장, 혜성씨가 부사장 겸 섭외담당을, 막내인 순성 씨가 기술과 공장장직을 맡았다. 국제공업사는 당시 서울의 도요다, 닛산, 시보레, 크라이슬러 등 상류사회의 고물승용차들을 훌륭하게 고쳐 유명해졌고 미군이 불하한 고물차를 새로 꾸며 팔아 돈을 모았다. 6.25가 발발하자 부산으로 내려가 전쟁 중에 망가진 미군 지프차와 스리쿼터를 수리해 주고 폐차 부속품들을 모아 차를 만드는 일을 계속하였다. 수복후 형재는 다시 "국제공업사"를 복구시켰다.

3형제는 무성 씨의 주장대로 국산차를 제작하기로 동의하고 엔진부터 만들기 시작했다. 제대로 된 설계도나 기술없이 경험으로만 만들어 내려고 하였기 때문에 고통이 컸다. 숱한 실패 후 1955년-4월 4기통의 휘발유 엔진을 완성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엔진인 것이다.

이후 5개월 후인 9월, 이 엔진을 얹은 최초의 국산자동차를 만드는데 성공하고 우리 손으로 자동차 만들기를 시작한다는 뜻에서 시발(始發)이라 이름을 지었다. 이 차는 드럼통을 펴서 만든 상자형 차체를 씌운 지프형 시발로 4기통 개솔린엔진에 전진 3단 후진 1단의 변속기를 가진 차였다. 문 두개에 5인승인 시발은 비록 지프모양이었지만 완전히 우리 손으로 디자인한 자동차였다. (자료 9)

시발이 탄생한 후 얼마되지 않은 1955년 10월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가 서울의 창경원에서 열렸는데 그들이 최우수 작품으로 선정되어 대통령상을 받게 되었다.33) 시발은 나오던 해에 8만환이었으나 사가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산업박람회에서 상을 탄후 신문지상에 오르내리면서 주가가 올라 차를 사기 위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8만환에도 잘 안팔리던 것이 30만환으로 뛰어 올라도 불티가 났다. 시발차는 이렇게 해서 수상한 지 한 달도 못되어 1억환의 계약금이 들어와 원효로에다 공장을 사들여 자동차회사의 모양을 갖추었다.34) 영업용 택시로 불티나게 팔려나가던 시발이 느닷없이 1956년 5월 8일에 공포 된 정부의 5.8라인으로 브레이크가 걸렸다. 할 수 없이 자가용 승용차의 개발을 서둘러 모양을 좀 더 예쁘게 다듬고 내부치장을 고급스럽게 꾸민 왜건형 시발을 내놓았다. 뉴 시발(New Sibal)이라 부르던 새 모델은 뜻밖에도 부유층으로부터 인기를 얻어 잘 팔려 나갔다. 이어 미국형 고급승용차를 만들기 위해 우리나라 최초의 엔진제도 기술자였던 김영삼씨가 만든 6기통 엔진을 얹은 세단형 고급차를 만들었지만 시작차 한 대로 시운이 없어 끝나고 말았다.

한편 시발이 잘 팔려나가기 때문에 한 달에 100대를 만들어도 모자라 정부로부터 지원받은 1억환의 융자를 보태어 공장과 시설을 확장했지만 이것도 올바른 시설과 기술을 갖춘 공장이 아니라서 완전한 차를 대량 생산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래서 최무성씨는 현대적 시설을 갖춘 공장을 지어 한 달에 1천대를 생산하기 위한 기술과 자금을 일본에서 물색하다가 이스즈자동차가 기술을 지원하고 미쓰 이상사가 2천 5백만달러를 빌려 주겠다는 약속을 받은 후 사업계획서를 정부에 제출하고 승인을 기다렸다. 이무렵 그는 기술제휴와 차관을 얻기 위한 로비활동, 무연탄 자동차개발, 사업 확장등으로 번돈을 몽땅 써버려 운영자금마저 바닥나고 말았다. 그래서 정부로부터 새 사업의 승인만을 기다리다 5.16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의 지원을 잃게 되었다.

최무성씨는 시발의 사가(社歌)를 황문평씨의 작곡으로 서울 스트링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동원하여 녹음한 후 TV에 내보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사가이자 당시로서는 아직 CM송의 개념이 없었지만 오늘날 CM송의 효시가 아니겠느냐고 작곡가는 말하고 있다. 방송을 통해 흘러나간 이 시발사가는 유행가가 대중가요의 전부였던 시절 특정한 상품이 주제였고 부르기 쉬운데다가 더구나 가사의 끝부분이 대중에게 쉽게 흡수될 수 있는 속세적인 뉘앙스를 가지고 있어 구설수에도 올랐다. 그렇지만 그만큼 쉽게 퍼져 서울 장안의 화제가 되었던 노래였고, 시발차를 선전하는데 큰 도움을 준 노래였다고 한다.

최무성씨는 시발의 사가와 한께 대한민국 정부수립후 최초로 자동차 광고를 했다. 당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서술식 선전문구로 광고를 냈던 것이다.

여러분! 우리나라를 외국인에게 자랑할 만한 꺼리를 찾아야 합니다.

우선 이 '시발'차를 타고 여의도 공항으로 나가십시요. 얼마나 외교의전에 도움이 될까요!35)

이 광고는 사실은 정부가 우리 국민을 상대로 한 광고가 아니라 외국인들에게 우리도 자동차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해 만든 광고였다. 당시 우리나라의 관문은 여의도 비행장이었고 외국인들도 이곳을 통해 출입했음을 짐작 할 수 있다. 시대상을 잘 보여주는 단적인 예는 최초의 국산 자동차 "시발차"의 광고로 외국인들에게 자랑거리가 되었으며 일반 국민들에게 많은 자부심을 주었다. 1959 년 발행된 "한국자동차광고연감"에 실린 시발차 광고를 자세히 살펴보면 지프형 6인승, 세단형 9인승, 1958년식 6인승 시발차를 사진과 함께 싣고 있다. 각 차마다 배기관, 전장, 전폭 등 사양의 수치까지 상세히 기술하고 가격이 저렴하며 연료소모량이 적고 승하차에 불편이 없다는 등의 특징을 9가지로 나누어 나열했다.(자료 10)

수입차 새나라

혁명 정부가 부정부패의 구악을 일소하고 나라를 재건한다는 목표아래 세운 경제개발 제 1차 5개년 계획 중에는 국내자동차공업 보호정책도 들어 있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정부는 재일교포인 박노정씨에게 "새나라자동차회사"의 설립을 허가해 주어 1962년 4월 "블루 버드"라는 닛산 자동차의 1천 2백 cc 짜리 소형승용차가 면세로 도입되어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대략으로 쏟아져 나왔다.

400대의 새나라중 150대는 외국인 전용으로 사용한다는 당초의 수입 명분은 1962년 5월 아시아 영화제가 열리면서 일반택시로 둔갑하였다.

가뜩이나 자동차공업을 독점하도록 특혜를 주어 국내 자동차업자들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던 차에 새나라는 일본 미쓰비시제 "콜르 1500"이라는 완제품 승용차 300대를 연구 명목으로 들여왔으나 자가용과 외국인용으로 팔아 더욱 의혹 을 깊게 했다.

1962년 5월 정부는 자동차공업보호법에 따라 소형차는 새나라가, 중대형차는 시발이, 디젤엔진은 한국기계가 생산하라는 전문화 조치를 내려 중대형차의 기술이나 제조 경험이 없던 최무성씨는 시발의 생산을 중단하고 버스를 만들어 간신히 명맥을 이었으나 서울에서 버스제조를 독점해가던 하동환자동차에 밀려 최초의 국산차 시발은 탄생 10년만에 비운의 막을 내리고 말았다.36)

어쨌든 새나라 차는 한국 자동차공업 현대화의 기수가 되었으며 외화사정 악화로 1963년 5월 문을 닫기까지 2,700여 대를 만들었고 그 후 새나라의 현대식 공장은 1965년 신진자동차로 넘어갔다. 한편 시발의 인기를 능가했던 새나라자동차는 시발차에 이어 해방후 두번째로 자동차광고를 동아일보등 당시의 일간지에 다음과 같은 헤드라인의 내용으로 냈다.

자동차 국산화 시대는 왔다!

앞으로 완전 국산화될 자동차의 실물은 이렇다!

전시 장소 : 서울시청 광장

전시 일자 : 1962년 3월 30일부터 4월 8일까지

후 원 : 상공부, 교통부, 전국택시운송조합연합회

새나라자동차는 시발처럼 재생부품과 드럼통을 펴서 만든 조잡스러운 자동차가 아니라 제대로 만든 진짜 자동차라는 것을 자신있게 광고했던 것이다. 그리고 실물을 시청광장에 전시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모터쇼였다.37)

1962년 5월에 공포된 "자동차공업촉진법"은 한국 최초의 자동차공업 육성을 위해 제정된 법으로 자동차공업을 하나의 궤도속에 정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이 법의 주요 내용은

1) 상공부장관이 자동차생산을 허가토록 하고

2) 국내 산업의 保護 육성을 위하여 외국산 자동차 및 동부분품의 수입을 제한하며

3) 자동차 제조용 시설재 및 부품은 국내 생산시까지 수입 허용 및 관세를 면제하고

4) 동 법은 1967년 말까지만 유효하도록 시한부로 시행되었다.

이상과 같은 자동차공업촉진법의 시행에 따라 1962년 5월 새나라자동차공업 (주)이 설립되어 국내 최초로 규모있는 자동차조립공장(생산능력 : 6,000대/년) 이 건설되어 같은 해 8월 일본 닛산자동차와 기술제휴로 전부품을 S.K.D.(Semi Knock Down)부품으로 도입하여 "새나라 승용차"를 조립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나라 승용차"는 막대한 외화를 사용하여 외국 자동차 부품을 수입하여 단순 조립만을 함으로써 국내부품업계의 심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고 결국은 1963년 7월부터 정부의 외화 사정 악화로 더 이상 S.K.D.부품을 도입할 수 없어 생산개시 1년도 못되어 생산이 중단되고 말았다. 결국 새나라 자동차는 신진자동차공업사가 인수하게 되었다.

하동환 버스

서울의 최무성씨가 최초의 국산승용차인 "시발"을 만들어 낼 무렵인 1950년대 중엽, 또 한사람의 자동차공업 개척자가 있었다. 바로 6.25의 부산물인 드럼통을 펴서 국산버스를 만든 서울의 하동환씨다.

하동환씨는 중학교를 마친후 "원효자동차 수리공장"에 취직하여 기술을 습득 하였다. 6.25중에는 공군에 입대하여 대구공군기지 정비창에서 근무하였고 수복 후 신촌 자기집 앞마당에 1955년초 정비공장을 차렸다. 차량수리를 하는 한편 쏟아져나오는 군용폐차를 불하받아 재생시킨 부속품과 망치로 편 드럼통을 가지고 버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정비업도 번성했고 드럼통 버스도 잘 팔렸다. 정비업을 시작한 지 1년도 못되어 5대의 버스를 소유하는 차주까지 되었다. 그는 재산을 정리한후 서대문구 창천동에다 대지 450평을 구입하여 순수한 버스 재작공장인 "하동환제작소"를 약관 25세의 나이에 세웠다.38)

하동환씨는 밀려드는 주문으로 공장이 협소해지자 당시 하동환제작소처럼 미군폐차를 가진고 새차를 만들던 "보성자동차공업사"의 탁연성씨와 1962년 12월 영등포 구로동에다 8천여평의 대지를 구입해 현대식 공장을 세우고 하동환제작소와 보성자동차가 합병한 하동환자동차공업주식회사를 출범시켰다.

새 공공장을 세우자 사업은 더욱 번창했다. 현대적인 시설에서 만들어 낸 하동환 버스는 운수업자와 운전사들로부터 절대적인 인기를 끌어 "하동환 보디"로 전국에 알려졌고, 1965년에는 서울시가 처음으로 좌석버스(지금의 직행버스)제를 실시하자 주문이 기하급수로 늘어나 서울시내 버스의 90%가 하동환버스였다.39)

1966년 가을 우리나라 최초로 보르네오섬의 브르나이로 리어엔진버스 1대를 수출하는데 성공했다. 엔진등 구동장치가 달린 새시를 일본에서 들여와 차체와 의자등 모든 내외장품을 순전히 우리 손으로 설계하여 만든 버스였다. 이어 1967년 두번째로 월남과 버스수출이 계약되어 수출되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기계공업 기술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빈번하게 불어오는 자동차 산업의 외풍으로 인해 하동환자동차공업주식회사도 점점 곤란을 겪게 된다. 1967년 새로 이 마련된 자동차제도 허가기준, 1972년 군소자동차 조립공장의 폐쇄조치로 하청 업체로 전락, 1986년에는 쌍용그룹으로 넘어가게 된다

신진 자동차

한편 자동차 부품공업계는 S.K.D.(Semi Konck Bown)부품의 조립에 의한 자동차 생산과 빈번한 생산차종의 변경으로 부품 생산을 위한 기본 방향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1964년 부품업계의 활성화를 위하여 "신진자동차공업(주)"를 조립공장으로 선정하고 한국기계의 디젤엔진, 대동공업의 승용차 엔진, 동양기계의 T/M 및 Axle을 자동차공업촉진법에 의한 허가 대상으로 추가하고 75개 부품업체를 계열화하여, 시설을 보강할 수 있도록 금융지원을 하도록 하는 자동차공업종합육성계획(계열화 방안)을 수립하여 추진하고 아울러 소형 승용차의 단계별 국산화율을 1단계 20% 이상, 2단계 40%로 정하고 자동차 부품의 국산화를 촉진하였다.

우리나라 자동차공업 개척에 앞장섰던 시발의 최무성씨와 드럼통 버스의 하동환씨에 이어 또 한 사람의 선구자였던 김창원씨는 일본에서 8.15 직전에 귀국 하여 공주에서 농업개혁에 절대 필요한 농기구 제작공장을 세우는 한편 자동차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6.25 전에 김창원씨는 형인 김재원씨와 함께 대전에서 일제시대 일본인이 경영했던 조선리연항공기 기재회사를 인수했다. 김창원씨는 이 회사를 한국리연공업회사로 개칭하고 자동차 엔진부속품을 만들어 미8군과 국군창설 이전의 우리 경비대 차량용으로 납품하는 기회를 얻어 군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954년 부산으로 옮긴 형제는 본격적으로 자동차사업을 벌이기 위해 부산 전포동에 있던 미군 모터폴(정비창)을 불하받아 그곳에 공장을 세운 후 부속품을 만드는 한편 군용차와 민간차의 수리 제작사업을 위해 1955년 2월 신진공업사라 는 자동차공장 간판을 달았다. 이 공장이 지금의 대우자동차 부산 버스공장의 전신이다. 6.25후 전쟁의 폐허에서 우리나라를 복구하고 재건하기 위해 유엔부흥기구인 UNKRA가 원조자금을 대략지원했다. 이중 자동차공업진흥비로 책정된 400만 달러에서 정비업 육성부문 지원금으로 서울의 국제모터스 사장 최재현씨에게 돌아간 47만 달러 중 20만 달러를 대한자동차공업협회의 도움으로 나누어 받아 신진공업은 새로운 도약을 할 수 있었다.

김창원씨는 이 돈으로 1958년 현대식 정비공장을 착공, 2년만인 1960년 5월에 완공했다. 그러다가 5.16 후인 1962년 10월 덕수궁 산업전람회에 출품했던 마이크로 버스가 상공부장관상을 탄 것을 계기로 정부는 신진공업의 실력을 인정하고 비로소 자동차를 정식으로 만들 수 있는 대형 및 중형자동차 조립공장 허가를 해주었다.40)

신진공업은 새나라자동차를 본떠 1963년 11월 1500cc 짜리 휘발유엔진을 얹은 신성호(新星號)가 탄생되었다.

"시발"에 이어 두 번째의 국산차이면서 세단형 승용차로서는 최초의 모델이었다.

비록 미군이 사용하다 버린 낡은 지프차의 부속품을 재생하고 망치로 철판을 두드려 만든 차체에 국산 유리창과 타이어를 단 "신성호"였지만 시발보다 훨씬세련된 숭용차였다. 김씨 형제는 우선 이 차가 순국산차임을 과시하기 위해 당시 서울시장이던 윤치영씨의 도움을 받아 1964년 4월 서울시청광장에서 완재품차와 완전 분해품을 전시해 국민의 주목을 끌었다.41)

한편으로는 국내 두번째의 국산 승용차인 신성호를 시발차와 새나라차에 이어 세번째로 신문에다 전시회 안내 겸 제품광고를 내었다. 1963년 4월 말 동아일보에 "국산승용차 전시안내"라는 제호 아래 다음과 같은 내용의 광고가 실렸다.

승용 자동차 국산화에 즈음하여!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의 이용도는 그 나라 문명의 척도가 되는 것이며, 이를 뒷받침하는 종합기계공업으로서의 자동차공업은 그 나라 산업의 바로메타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의 자동차공업은 5.16혁명을 기점으로 하여 과거의 후진성을 탈피하고 본격적인 공업화 단계에 임하는 새로운 양상을 띠우게 되었습니다.

이제 폐사에서는 완전히 계열화된 국내의 100여 협력공장 및 관련공장과 제휴하여 1964년 말을 목표로 자동차의 국산화 체제를 갖추게 되었으며, 그 계획

생산의 일환으로 금번 신성호를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이는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인들이 오늘날까지 흘린 피와 땀의 결정이며, 조속한 국산화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는 데에 자못 그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앞으로도 계속적이며 부단한 기술의 혁신과 품질의 향상을 기함으로서 보다 좋고 보다 싼 자동차를 하루 속히 국산화하여 여러분에게 보답코져 하는 바입니다.

대표이사 김 창 원 백

전시 장소 : 서울 시청 앞 광장

전시 기간 : 1963년 4월 22일부터 5월 1일 까지

본사 및 공장 ; 부산시 전포동

서울사무소 : 을지로 3가 초동

그러나 신성호는 생각만큼 팔리지 않았다. 그것은 새나라자동차가 인기를 끌고 있었을 때였고 값도 새나라보다 2배나 비쌌기 때문이다. 즉, 새나라가 22만 4 천원이었던 것에 비해 신성호는 55만 5천원이었다. 차값도 문제였지만 미군 지프차의 엔진 변속기 등을 재생해 사용한데다가 철판을 두드려 만든 차체, 국산 판유리 차창, 그리고 국산 재생타이어등 거의가 재생 승용차인 신성호는 일제를 그대로 들여와 조립한 새나라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신성호는 300여대를 생산하고 생산을 중단해 버렸다. 그러나 신진공업사는 신성호 때문에 상공부로부터 소형승용차의 제작허가를 얻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고 이에 따라 신진공업사는 소형, 중형, 대형 자동차의 제조허가를 모두 얻어 실질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자동차회사가 되었다.42)

이어서 신진자동차공업사는 일본 도요타(豊田)와 기술제휴로 "코로나" 7,700 여대를 생산함으로써 업계의 선두주자로 부상한다. 1966년부터 67년까지 약 2년간은 신진자동차의 "코로나"의 독주가 시작된다. 그러나 1968년 현대의 "코티나‥‥ 아세아의 "피아트"등 승용차를 앞세운 이들 2사의 가세로 시장쟁탈전은 점점 치열해졌고 일본 동양공업과 기술제휴로 4륜차를 중점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한 기아가 그 뒤를 바짝 쫓고 있었다. 신진의 "코로나"는 국산화율이 21% 정도에 불과했지만 자동차의 절대 대수가 부족하던 시기에 큰 인기를 얻었다. 이 차는 시발차, 신성호와 함께 태동기에 접어든 우리나라 자동차공업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한 차로 기록될 수 있다.

최초의 자동차사진 전시회

한편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사진전시회는 1965턴 3월 15일 지금의 서울신문사 자리에 있던 신문회관 1층 대전시장에서 전영선씨가 세계 각국의 자동차 발달사 사진전시회를 열었던 것으로 현재의 교통신문의 전신인 주간 자동차신문이 주관하고 교통부, 상공부,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전국자동차운송사업조합의 공동 후원으로 세계 13개국에 있던 50여 개의 유명 자동차회사들로 부터 모은 80년 간의 자동차 외형 변천사를 담은 사진 1천여점과 그가 그린 디자인작품 50여점이 전시되었다.43)

해방 이후부터 1954년까지의 광고를 보면 1920년대의 광고처럼 제품 및 점포 고지 광고가 눈에 많이 보이는데 1946년 9월 14일부터 하루 혹은 이틀 간격으로 동아일보에 실린 원동무역공사(주)의 광고에서는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자료 11) 3차례에 걸쳐 시리즈로 집행된 이 광고는 제작기법상으로는 두드러지지 않지만 같은 사이즈와 형태로 시리즈화했다는 것이 주목할 만하다. 헤드라인은 "여러 분의 自家用 乘用車 下命은 원동으로! 언제든지 좋은 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라는 제품 공급 내용이 대부분이다. 1차에서는 차의 일러스트를 작게, 2차에서는 좀 더 크게, 3차에서는 차의 형태와 크기에서 변화된 일러스트를 넣고 있다. 요즘의 티저광고 형식으로 제작, 광고 효과를 높이고자한 의도를 높이 살 만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일본 자동차 광고는 사라지고 미국과 영국의 자동차 광고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1955년 8월에는 한국자동차배급(주)의 "영국 오스틴 자동차 취급 안내"광고(자료 12), "월리스 지프"를 소개한 국제 공업사의 광고 (자료 13)같은 점포 소개형 광고가 실려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새나라 자동차"의 광고를 보자. 이 차는 실물이 나오기 4 개월전 일반인등에게 공개되었음이 전시고지 광고를 통해 알 수 있다. 1962년 3 월 30일 동아일보에 실린 이 광고는 내용이 상당히 자극적이고 과장이 심함을 알 수 있다. (자료 14) 이 광고에 의하면 전시장소는 서울시청, 전시일자는 3월 30일 부터 4월 8일까지 10일간, 후원은 상공부, 교통부, 전국택시운송조합연합회로 새나라자동차의 정치적 배경을 어느 정도 알 수 있다.

보리고개를 넘기기에 바빴던 일반 국민들에게 대중적인 성격의 광고를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자동차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정부 고관, 돈많은 부자들로 한정되어 있었던 시기에 광고를 통해 고객을 확보한다거나 차의 성능, 특징을 소개하려는 의도는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또 1962년 7월 5일자 동아일보에 게재된 광고는 새나라자동차가 생산 공장을 건설 8.15를 기해 자동차를 생산한다는 내용이다. 공장조감도를 배경으로 일본 닛산의 불루버드 제품 사진을 넣고 자동차공업 부흥을 위한 자사의 노력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자료 15)

(3) 성장기 (1968-1979)

「신진」을 비롯한 및「아세아」간의 판매경쟁은 1965년부터 점차 가열 되기 시작, 1970년부터는 본격적인 경쟁에 돌입했다. 「신진」은 당시 국내 최대 자동차 메이커로서 기존의 코로나와 크라운 승용차 외에도 1968년 8월 퍼블리카 승용차를 생산했다.「신진」은 1968년 중에 랜드크루저, 밴 트럭, 1.5톤 신진에이스, 8톤 카고, 10론 트럭등 제품라인을 구비했다. 이어 1969년에는 미니버스, 8톤 덤프트려은 물론 지프까지 생산을 확대해 1970년에 지프 조립공장을 준공하는등 기존 판매망을 공고히 하면서 이를 더욱 확대하는 데 총혁을 기울였다.

그동안 T-600, 7-1500, 1-2000등의 삼륜차 제조회사로서 자리를 굳힌 「기아 산업」도 일본 本駱(혼다)技硏(1967년 8월) 및 동양공업(1967년 12월)과 기술제휴를 체결했다. 「기아산업은 1971년부터 사륜화물자동차에 관한 추가 기술 제휴를 맺고 사륜트럭을 생산하기 시작함으로써 화물차 분야에서의 경쟁에 가세했다. 한편 「현대자동차」는 1968녀 2월부터 「포드」와의 기술제휴로 본격적인 생산에 착수했다. 「현대자동차」는 1968년 11월 「코티나」를 첫 출고하고 1969년 1월에 는 D-750 트럭을 생산했다. 「현대」는 이어 1969년 5월에 중형승용차 「포드 20M」, 8월에는 R-152 버스를 생산함으로써 비로서 승용차, 트럭, 버스를 모두 생산, 기본적인 차종 계열을 구축했다.「현대」는 1970년에 들어서도 생산차종의 다양화를 계속 추진해 8톤 덤프 트럭과 「코티나 픽업」의 생산을 추가하고 DK-182 버스와 각종 특장차 생산을 개시했다.

「아세아」는 프랑스 「르노」 공단과 자본 및 기술도입 협의 과정이 지지부진하자 1968년 제휴선을 이태리「피아트」사로 바꾸어 자본재 및 기술제휴계약을 체결 했다. 이후 「아세아」는 광주 공장을 준공하고 1969년에는 조립, 도장공장을 완공 한 후 1970년--4월부터--피아트 124를 생산 승용차 판매경쟁에 뛰어들었다. 「아세아」는 처음 「피아트 124」 승용차를 물품세 포함 대당 127만원에 판매했으나 한달 만인 5월부터는 가격을 10% 인하해 115만원에 판매하는등 판매전을 가열시켰다.

이처럼 자동차 각 사간의 경쟁이 치열해지자 자동차 생산능력도 크게 늘어났다. 1966년 국내 자동차 생산능력은 년 6,000대에 불과했으나 1971년에는 년 5만대로 5년간 약 9배 가량 늘어났다. 자동차 생산실적도 1966년 3,430대에 지나지 않았으나 1970년에는 2만 8,819대에 달했다. 이에 따라 자동차 보유대수도 크게 늘어났는데 1966년 약 4만9,000대에서 1969년에는 약 10만 9,000대로 10만대를 돌파했으며, 1971년에는 14만대를 넘어섰다. 이같은 자동차산업의 비약적인 발전은 무엇보다도 그간의 독점체제를 지양하고 경쟁체제를 도입한 데 따른 것이다. 그러나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국민경제의 성장, 개인소득 증대 및 고속도로 개통 등의 요인도 자동차산업 발전에 큰 도움이 되었다.44)

1968년 10월 3일 동아일보에 실린 포드자동차 광고(자료 16)가 현대자동차 (주)의 최초의 광고다. "기술과 품질을 자랑하는 포-드 자동차!"라는 헤드라인으로 60년대말 시작됐던 자동차 광고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신진의 독주에 대해 현대, 아세아가 가세한 판매경쟁으로 본격적인 자동차 생산 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자동차 생산 경쟁과 더불어 3사의 광고경쟁도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들 3사의 광고는 광고기법이나 매체의 효율적인 이용 측면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8년 동아일보에 게재된 동양 TV 최고 인기프로 200회 돌파기념 특별 대공연 쇼가 신진의 퍼브리카 협찬으로 열린다는 것이 우리나라 자동차광고 사상 최초의 이벤트광고로 기록된다. (자료 17)

「신진」의 주력 차종은 "코로나", "퍼브리카", "크라운"등이었고 「현대」는 "코티나", "포드 20", 「아세아」는 "피아트 124"였다. 광고량이 제일 많았던 「신진」은 "69년 최신형 신진 코로나 판매개시!"라는 헤드라인과 함께 차의 장점을 성능, 안전도, 스타일의 3가지로 나누어 표현(자료 18)하는 등 광고의 전략적인 요소를 가미하게 된다.

또 신제품 고지광고가 주류를 이루다가 "우리 실정에 알맞는 신진자동차"라는 광고처럼 "즐거운 휴일을 신진자동차와 함께"하는 식의 생찰밀착형 광고로 방향을 바꾸고 있다. 당시만 해도 승용차 가격이 비싸 서민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던 시기에 라이프스타일식 광고사진은 시기상조의 느낌이 있다. 그러나 이런 것 이 수요를 늘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보인다. (자료 19)

이때부터 신진의 "코로나"광고는 본격적인 광고의 틀을 갖추기 시작했고 실제 성능이상의 과대광고를 한 흔적도 보인다. 이런 배경속에서 나온 현대자동차의 광고인 "현대자동차는 과장을 하지 않습니다"와 "언제나 안심하고 타실 수 있는 포드의 코티나"라는 광고는 보다 소비자의 입장에서 소구하려는 흔적이 드러나고 차량 제원을 상세히 기술하여 성능에서 우세함을 강조하기도 했다. (자료 20) 특히 1969년 9월 2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광고(자료 21)는 "승용차 구입의 필수조건을 아십니까?"라는 의문형 헤드라인 아래 자동차를 살 때는 안전성, 승차감, 내구성, 애프터서비스의 4가진 조건을 생각하라고 호소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는 자동차를 비쥬얼로 사용한 이 광고는 비록 단순하지만 내용은 지금 보아도 손색이 없다.

아세아 피아트 124의 광고(자료 22)는 "견고하고 경제적인 승용차 피아트 124-안락, 고속, 안전"이란 내용으로 주요 장점만을 간략하게 소개하여 임팩트 효과를 노린 것이 돋보인다.

이처럼 이 시기의 광고는 대개 회사 규모의 과시, 차의 성능, 장점을 나열하다가 3사의 판매경쟁이 점차 가열되는 시장상황에서 몇가지 장점, 즉 성능, 안전도만을 중점적으로 소구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967년 설립된 현대자동차가 회사 설립 이후 시급하게 서두른 것은 포드사와 조립계약을 체결하는 일이었다. 이 계약과정은 나중에 세계 자동차메이커와 기술협약시 큰 경험이 되었고 점차 독자노선을 추구하게끔 각오를 다지게 했으며 그간 조립생산단계에서 벗어나 소형차개발에 박차를 가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당시 계약서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계약 차종은 미국 포드사의 헤어레인 승용차와 포드 20M, 영국 포드사의 코티나, 독일 포드사의 타우너스 17M트럭등이다. 이것은 비포장도로와 좁은 골목길이 많은 우리나라의 도로사정을 고려하여 기동성을 발휘하는 차종으로 선택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1960년대말에는 당시 공업지역으로 고시된 울산을 공장설립의 최적지로 판단하고 총 7만 1천여평의 부지를 매입하는 등 자동차의 자체 개발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이후 1974년 기존 울산공장을 포함, 약 60만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대규모 종합자동차공장 입지선정을 숭인받았다.

오일 쇼크와 소형차 개발

1973년 11월 중동전쟁으로 인한 오일쇼크가 왔다. 중동산유국들의 일방적인 유가인상으로 우리 경제는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1971년에 유가가 평균 21% 와 14% 2차례에 걸쳐 올랐고 이런 경제사정을 감안, 1972년에는 경제안정과 성장에 관한 긴급명령이 발표되었다. 또 경제난국을 틈타 1972년 12월 유신헌법이 공포된다. 1973년에는 유가가 13%, 30%씩 두 차례에 걸쳐 인상되었고 1974년에는 세 달사이에 l13%가 올라 우리 경제에 심한 타격을 주었다.

이런 시대상황과 맞물려 소형차의 개발붐이 일기 시작하였다. 흔히 소형차는 배기량 1500cc 이하의 차들을 말한다. 나라마다 소형차의 구분 기준이 약간씩은 다르지만 우리나라에는 세제상의 문제로 중형차의 차체에 엔진만 1500cc급을 장착한 것들이 많아 내용보다 외양을 중시하는 풍조를 알 수 있다.

소형차는 값에서나 유지비, 차체의 크기등에서 합리적이고 복잡한 도로사정과 교통수단의 기본조건을 만족시키고 있어 자동차산업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는 소형차가 성장기를 거치면서 자동차의 해외수출이라는 활로를 개척해준 주역이기도 하며 모터리제이견을 이끌어가는 차종이다.

1973년 정부에서는 에너지 절약시책을 발표했으며 정부의 다각적인 에너지 절약 대응책 중 자동차에 대한 부분을 살펴보면 "한국 고유의 모델자동차를 생산하여 저렴한 가격에 공급할 수 있도록 국민차 개발에 역점을 두라"는 조치를 취해 1970년 초반부터 자동차 메이커들이 소형차의 개발에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게 되었다.

기아의 브리사는 각축전이 치열하던 자동차시장에 파죽지세로 시장을 확보했고 시대 상황과 맞물려 수요자들의 반응이 매우 좋았다. 심지어는 없어서 못판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으며 영업용 택시로도 각광을 받아 1975년 말에는 서울 시내 택시의 50%를 넘어서게 되었다.

1974년 기아산업이 브리사의 제작승인을 신청하고 당국의 허가를 기다리고 있던 중 예고없이 박 대통령이 소하리 공장을 방문했다. "저 사람들이 기술을 지도해 주느냐"고 하자 안내를 하던 간부가 "저들은 기술을 배우러온 독일 학생들 입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로부터 한달 후에 당국에서 제작 허가가 나왔고 브리사의 생산 및 국산화율을 80% 이상 높이는등 수요면에서 폭발적인 신장세를 보였다.

1966년 5월 일본 도요다와 기술 제휴로 코로나를 생산, 시판하기 시작했던 신진자동차는 1970년 뉴코로나로 모델체인지하고 1972년 11월까지 생산하게 된다. 당시 70% 정도의 시장을 유지하고 있던 신진은 부평에 50만평의 대지를 확보하고 하동환자동차, 대원안전유리와 합자를 하고 대원철강을 인수하는 등 사세를 확장해갔다. 이뿐 아니라 전국 주요도시에 자동차학원, 신진공업고등학교등 교육 기관을 설립했다. 또 한국기계회사를 인수하고 부산에 신진지프를 생산할 수 있는 공장을 신설하는 등 대재벌 그룹에 올라서게 되었다. 코로나, 크라운등으로 사세를 늘려가던 신진자동차는 1972년 미국 GM과 50대 50의 자본 비율로 합작, GMK(지엠 코리아)를 설립한다. GMK는 호주에서 보디, 독일에서 엔진과 트랜스미션을 들여와 시보레 1700(1972년 9월)을 선보였고 고급 승용차 레코드 1900(1972 년 12월)을 생산했지만 값이 비싸 수요가 많지는 않았다. 시보레 1700은 4기통으로 튼튼하고 힘이 좋았으나 기름이 너무 많이 들어 고객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신진, 현대, 아세아, 기아의 4파전 양상을 띄던 1970년초의 자동차업계는 저마다 외국 합작선을 찾거나 연관이 되어 있어 국산화는 갈수록 힘이 들었다. 외국 자동차업계와의 합작은 부품을 들여와 조립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차의 가격이 높게 형성되고 소량생산이 불가피했다. 따라서 시설투자가 적었고 외자도입을 부채질하여 만성적인 적자에 허덕이게 하여 자동차산업의 국산화와 성장을 저해했다. 이런 사례중의 하나가 GMK로서 경영부실과 오일쇼크를 견디지 못하고 1976년 새한자동차로 재출발을 하게 되지만 숱한 시행착오와 당시 전반적인 경제침체를 극복하지 못하고 다시 대우그룹으로 넘어가고 만 것이었다.

이 시기는 의욕적인 경제 부흥정책을 실천하던 우리나라로서는 일대 타격을 받은 시기로 구체적인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오일쇼크로 인해 경제에 막대한 타격을 받았다는 전이다. 불과 몇달 사이에 껑충껑충 뛰는 기름값으로 다른 산업에도 많은 영향과 타격을 주게 된다. 즉, 오일파동으로 인해 자동차업계에서도 소형차의 개발 의지가 싹트기 시작했고 그 전까지만 해도 시장을 주도해가던 중형차의 생산이 줄어들고 기름이 덜 드는 소형차가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트럭의 수요가 많아 당시 경제주도 정책과 시대상황을 파악할 수 있다 는 점이다.

셋째, 외국 유명 자동차 메이커와 조립 계약을 맺고 있던 국내회사들이 자구책 마련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점이다.

부지를 확보하여 대단위 생산공장을 증설하거나 부품의 국산화율을 높이기 위한 피나는 노력을 알 수 있다. 이런 어려운 상황속에서 소형차의 기수로 "포니"가 등장하면서 우리의 자동차업계는 새로운 장을 맞이하게 된다.

자동차 광고 경쟁

60년대 후반의 자동차 판매경쟁은 70년대초 자동차업계의 광고 경쟁으로 이어졌다. 신진, 현대, 기아자동차로 압축된 자동차업계는 도로확충, 국민생활향상 등에 힘입어 수요가 증가되고 모터리제이션의 잇점이 일반 국민들에게까지 인식이 확산되었다.

현대자동차는 울산에 대규모 자동차공장 부지를 확보하고 기술자립의 의지를 불태웠던 만큼 광고에 있어서도 기업 PR이나 판매성 광고를 병행 집행한 것이 특징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등에 게재된 코티나 광고를 보자. 이미 소비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자동차의 이미지를 유지하고 판매곡선의 상승을 꾀하는 코티나광고(자료 23) "코티나, 왜 영업용으로 더 우수한가?"라는 헤드라인 아래 경제적이고 간편한 유지관리, 넓은 실내와 시속 160km의 속력, 고속도로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주행성능, 이중 브레이크와 안전유리등의 안전성과 함께 국내 최초로 20개월 장기할부 판매조건까지 제시하고 있다.

이것은 철저하게 마케팅 요인을 광고에 부각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또 차의 전측면을 심플하게 보여주면서 "선착순으로 계약접수"라는 헤드라인을 내건 포드 20M의 광고(자료 24)를 보면 더욱이 판매에 치중한 것을 알 수 있다.

오일쇼크에 따른 에너지 절약운동으로 말미암아 판매가 잠시 주춤하자 각 업체들은 당시 자동차 판매조건을 상당히 유리하게 제시하기도 했다. 1970년 3월 25일 동아일보에 실린 6인승 코티나 광고(자료 25)는 영업용 차량에 대해 특별봉사를 실시한다는 내용이다. 도심의 출근상황을 설정, 비주얼화한 이 광고는 실생활에 좀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 당시의 현대자동차 광고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1970년 4월 서비스를 주 내용으로 한 것과 1970년 5월 자동차 각 부분을 해부하듯 꼼꼼하게 보여준 광고(자료 26)이다. 먼저 서비스 광고는 "포드차가 가는 곳에 현대의 서비스가 뒤 따릅니다"라는 헤드라인과 계속 확장되고 있는 정비, 부품망을 지도와 도표를 통해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시발자동차 잡지 광고에서 제품의 제원과 성능을 도표로 보여준 예가 있지만 서비스 내용과 전국 곳곳의 정비망까지 보여준 것은 처음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는 제품의 판매에서 끌나지 않고 사후관리까지 염두에 둔 것이며 장기적으로 대고객 이미지를 높이는 데도 기여한 광고로 보인다. 헤드라인만 놓고 봐도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보이며 요즘 집행되는 광고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수작의 카피이다.

또 자동차의 중요한 부분들을 상세히 설명한 광고(자료 27)는 전부 9가지를 따로 끄집어 내어 기술하고 있다. 험로에 더욱 알맞는 차체의 19개 요소를 보강했다는 것과 완벽한 제동력의 2중 브레이크, 생명을 보호하는 전면 특수 안전유리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어 독자들이 광고 및 자동차를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서비스 및 정비망을 소구한 광고가 많은 것은 이 시기가 영업용 차량의 수요가 많았고 영업용 운전기사들이 차량의 평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비자 보호개념을 도입한 시기가 바로 이때부터였다.

1970년대초 신진자동차는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를 살펴보면 광고량에 있어서 현대자동차에 절대적으로 뒤지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1970년 한해동안 동아일보에 게재된 광고는 5단 사이즈가 4회, 조선일보에는 5단 사이즈 2회가 집행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현대자동차는 동아일보에 10회, 조선일보에 3회로 거의 배가 넘는 차이를 보인다.

한편 신진자동차의 광고는 실생활과 밀착된 내용으로 친근한 이미지와 소비자들의 공감대를 형성하려고 했다. (자료 28)

1970년 3월 "여러분에 의해 입증된 코로나의 우수성"이란 헤드라인의 광고는 비교적 현재의 광고 내용과 비슷한 것이지만 같은 해 4월 1일 실린 "출근길에 짜증이 나서야 되겠어요?"라는 미니버스의 광고(자료 29)를 보면 출근길의 복잡한 상황과 카라이프의 편리성과 함께 당시의 시대상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반어법의 카피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친근하고 자상스러운 바디카피와 함께 스펙도 간결하게 노선영업용에, 교통난 해소에, 출퇴근 전용에, 즐거운 여행에 신진 미니버스를 이용하라고 미니버스의 용도까지도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있다.

1970년 6월 23일 1970년형 신진코로나 광고(자료 30)를 보자. "완전히 새로워진 신진 코로나 '70 탄생"이란 헤드라인 아래 계기판과 스티어링 휠과 변화한 부위를 작은 사진 컷으로 처리하였다. 대부분의 광고가 차 한대를 비주얼로 한 것에 비해 작은 부분까지도 여백을 활용하려는 흔적과 카피부분을 우측으로 배치해 레이아웃상 시각적인 효과를 노린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시기에 비슷비슷한 광고가 많은 것은 제작기술상의 문제에 원인이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촬영차량도 없이 제작하던 시기라 그 어려움은 짐작이 가고도 남을 것이다. 사진 촬영기술이 뛰어나지도 못했지만 제작상의 편리등으로 대부분 제품사진만으로 처리한 것이 많았고, 일러스트나 새로운 기법을 가미한 것은 별로 없다. 자동차 3사 모두가 근본적으로 자동차광고의 제작비용이 매우 적고 직접처리보다는 자료화면을 이용한 비주얼이 많아 전체적으로 만족할 만한 광고 효과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1970년 5월 16일 동아일보에 실린 현대자동차의 1970년형 코티나 탄생 광고 (자료 27)와 약 3달후인 8월 21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아세아자동차의 피아트 124 광고(자료 31)를 보면 레이아웃, 비쥬얼등이 거의 같아 묘한 느낌을 자아낸다.

헤드라인만 다를 뿐 다른 요소들은 거의 판에 박은 듯 같다. 자동차의 주요부분을 5가지 정도로 나누어 설명한 것이나 비쥬얼도 자동차의 사진을 도어만 살짝 열린 상태로 보여준 것이나 카피부분을 우측으로 배치한 것이나 얼핏보면 어느 것이 진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모방 광고

광고사에 모방광고에 대한 에피소드나 화제가 기술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일로 보여지며 특히 법적인 규제조치도 제대로 마련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예는 1970년 6월 23일 신진자동차의 코로나 70 탄생 광고(자료 30)와 같은 해, 같은 신문의 6월 26일 현대자동차의 코티나 광고(자료 27)에서도 보여진다. 두 광고는 전측면이 보여지는 차의 사진과 레이아웃이 거의 대동소이하여 구분이 애매모호하다. 특히 브랜드명도 하나는 코로나 또 다른 하나는 코티나로 가운데 한 글자만 다를 뿐이다.

비쥬얼의 소재로 비슷한 것을 사용한 예가 있다. 비행기의 비행 장면을 차와 함께 보여준 뉴코티나 광고와 여객기의 모습을 이용한 레코드광고가 그것이다.

이는 모방 광고가 제품 판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거나 회사의 이미지에 손상을 끼친다는 인식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차체를 들여와 조립하던 시기에 판매가 회사성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타회사에서 광고를 게재하면 덩달아 광고를 집행하는 등 일종의 판매신경전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요소들은 광고제작 기술이나 발전을 저해하는 부분으로 작용했지만 1970년대 후반으로 널어가면서 본격적인 광고전문대행사가 하나 둘 생겨나고 전문인력의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긍정적인 측면으로 발전해 갔다.

컨셉이 모호한 광고

한편 컨셉이 모호한 광고들을 살펴보자. 신진자동차에서 조립, 생산되면서 시작된 지프광고는 제품의 특성상 험로 주행이나 박진감이 넘치는 비쥬얼이 후련한 느낌을 주었지만 1970년 12월 7일 동아일보에 게재된 신진지프의 광고는 컨셉이 불명확하다. (자료 32) "무엇을 도와드릴까요?"라는 헤드라인만을 놓고 보았을 때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을 뿐더러 브랜드네임도 지면의 좌측하단부에 작게 보여줌으로써 광고의 본 의도를 흐리고 있다. 바디카피나 본문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지프차 대수의 한정 생산에 따른 계약 접수 마감을 고지하는 광고임을 겨우 알아차릴 수 있다.

상징적 비주얼을 가미한 광고

1971년부터의 자동차광고에서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전까지의 광고가 제품만을 보여주는 단순 비주얼을 사용했던 것에 비해 이때부터는 많은 광고에서 상징적 비주얼을 가미하고 있다는 점이다. 상징적 내용으로는 타자가 호쾌하게 타격 하는 장면(자료 33), 왕관을 이용한 것(자료 34), 달리는 말과 기수의 모습(자료 35), 비행기 조종사와 비행기의 이륙장면(자료 36), 날개를 펼친 우아한 학의 모습(자료 37)등이다.

1971년 7월 15일 동아일보에 실린 신진의 크라운 광고는 브랜드의 이미지와 맞게 호화찬란한 왕관을 차 상단부위에 배치시키고 "귀하를 왕좌로 모십니다. "라는 헤드라인으로 왕관의 권위, 왕좌의 품위를 갖춘 차임을 고지하고 있다. 질주하는 경주마와 기수를 이용한 현대자동차의 뉴코티나 광고도 완전히 새로운 스타일과 성능을 갖춘 차임을 "달리는 무스탕-뉴 코티나"라는 헤드라인을 통해 전달 하고 있다. 1975년 8월에 집행된 코티나 광고는 우아한 학의 비상장면을 이용하여 스타일 면에서 품위있는 차임을 전해준다. 상징적인 비주얼을 사용한다는 것은 제품의 성능, 이미지 등이 그 내용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룰 때 그 효과가 커진다. 2차 세계대전시 맹위를 떨쳤던 무스탕기를 이용한 뉴코티나 광고도 우수작 으로 꼽히기도 했으며 특히 포드 20M 광고(자료 38)는 한쌍의 연인이 호반에서 거닐고 있는 비주얼을 사용, 동아광고상까지 수상했다. 이는 제품의 이미지를 상징적인 소재를 통해 소비자의 감정에 소구함으르써 광고효과를 높이려는 의도로 파악된다.

이 시기의 자동차 광고는 크게 4가지로 특징을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판매에 치중한 광고들이 많다는 점이다. 브랜드 고지와 취급안내에 급급했던 광고들이 많았던 것에 비해 절차 광고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호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광고에 욕심을 많이 내어 제품의 장점을 있는 대로 알리려 했던 것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가장 강조해야 할 부분만 명쾌하게 전달 하고자 하는 노력들이 보인다.

둘째, 광고에 상징적 비주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동차의 특성과 경쟁체제속에서 차별화된 요소를 찾기 위해 새로운 소재를 이용했다. 상징적 비주얼을 통해 제품의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으로써 앞으로의 광고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셋째, 일반 국민들에게 광고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브랜드와 심볼마크를 공모했다는 점이다. 이것은 순수한 국산 신제품의 시판에 따른 소비자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중폭시킨 최초의 자동차 광고라는데 중요한 의의를 둘 수 있다.

넷째, 경제개발 계획이 착실히 진행됨에 따라 상용차의 수요와 광고도 많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는 3사가 광고제작에 있어서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보완, 발전을 거듭해간 때였다. 1975년 「현대자동차」는 내외자 1억$을 투입하여 울산의 67만평의 공장부지에 연 8만대 생산 규모의 종합자동차공장을 완공하고 가동시키면서부터 차체, 변속기, 브레이크, 조향장치 등을 국산화함으로써 국산화율 80%의 순국산 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양산하였다.

포니는 탄생이전부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켰으며 독자적인 자동차 공업기반 구축의 계기가 되었다. 포니의 독자개발 계획은 1973년 4월부터 추진되었다. 3년 이상의 노력끝에 선보인 포니(조랑말이라는 듯)는 이탈리아의 「주지아로」가 설계 한 것으로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롱노우즈, 파스트 백 형이었다. 이것은 후면 스타일이 뛰어난 현대적 감각에 맞는 스포티한 형태라 할 수 있다. 또 앞이 길기 때문에 충돌시 충격을 최대한 흡수해줌으로써 승객의 안전을 도모하고 공기 저항을 최소화함으로써 주행안전성이 뛰어나다고 할 수 있다. 이 포니는 4기통 1238cc, 80마력의 미쓰비시 새턴엔진으로 에너지 파동이후 이에 대처하기 위해 경제성과 함께 강한 내구성을 발휘할 수 있도륵 새롭게 설계된 것이다. 앤진배기량에 비해 출력이 커 여유있는 구동력을 갖추고 있으며 고속주행시에도 무리가 없고 등판능력도 뛰어났다. 시속 100km를 내는데 27초가 걸림으로써 복잡한 시내 주행에 적합하며 연료소모량 또한 리터당 13-2Okm로 유지비가 저렴했다. 차체는 0.8mm의 철판을 이용했고 국내 도로사정에 맞추어 험로주행에도 무리가 가지 않도록 했다. 첫 출고 당시의 국산화율은 90%로 국내 생산이 불가능하던 카브레타 등 일부부품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산화하여 독자생산을 시작하였다.

1975년부터 생산, 시판된 기아의 "브리사"의 독주에 1976년 포니가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4월에는 GM 코리아의 1492cc "카미나"가 1978년에는 1500cc 73 마력의 "제미니"가 뛰어들어 치열한 판매경쟁을 하였다. 이 경쟁은 국민들의 관심속에 진행되었으며 관심도가 곧 3사에 대한 비교우위에 대한 평가로 직결되었으며 이것이 3사의 판매와 사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3개 차종을 비교해 보면 마력에서는 포니가 가장 앞섰지만 카미나는 최대의 토우크를 같고 있었다. 포니는 배기량이 1238cc, 최대출력 80마력으로 배기량에 비해 높은 출력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하루에 400km이상을 주행해야 하는 영업용 차량으로서는 포니가 인기를 모았다. 50년대 이전의 광고가 일반광고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을 특징으로 꼽을 수 있다면 60년대 광고는 제작기법이 미숙하고 소구방향에서 혼란을 겪는 등 그저 정보전달에 급급했던 시기였다. 70년대 광고는 자동차광고로서 기틀을 잡기 위해 노력했으며 비로서 경쟁사를 의식한 대중광고들이 나타나는 시기였다. 또한 판매를 의식한 제반요소들이 광고에 삽입되는 등 테크닉을 구사하려는 노력들이 드러난다. 요즘의 카피요소와 비쥬얼을 어느 정도 구분하였고, 자동차의 메카니즘과 성능을 세세히 기록하는 등 전반적으로 광고기법을 연구, 시험했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 시기에 제약회사 광고팀은 벌써 탄탄한 제작 실무진들이 구성되어 광고기법이나 효과면에서 상당한 발전을 이루고 있었다. 광고비용면에서도 자동차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많은 투자를 계속했다. 포드사의 계약 체결시 자존심이 상했던 현대자동차는 굴욕적인 모욕에서 벗어나는 길은 우리 손, 우리 기술로 자동차를 개발, 생산하는 일임을 절감하고 자동차의 독자개발에 착수 하여 성공을 거둔 후 국내 최초로 탄생한 국산승용차 광고를 내었다. 차의 모습을 천으로 가려 공개하지 않고 독자들로 하여금 광고에 직접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내용이었다. 1974년 7월 19일에 동아일보에 실린 이 광고(자료 39)에서 "국내 최초의 한국산 승용차에 부칠 차명과 심볼 마크를 공모 합니다"라는 헤드라인은 독자들로 하여금 상당히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었다.

포니는 토리노 모터쇼에서 상당한 인기를 끌었으나 처음 시판되었을 때에는 새로운 형태의 디자인으로 인해 그다지 큰 호평을 받지 못했다. 당시 세단형 승용차만을 보아온 국민들이 파스트 백 형의 승용차를 처음 대했기 때문에 이상하게 보였을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스타일은 세계 소형차 시장에서 유행하던 디자인으로 포니는 세계 시장을 위해 파스트 백 형으로 제작되었다. (자료 40)

국내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 1976년 4월 30일에 게재된 "아름답고 경제적인 포니"라는 광고(자료 41, 42)는 세계 유명차들의 최신 스타일이 파스트 백 형이며 공기저항을 최소화 하여 경제성이 뛰어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포니의 스타일이 눈에 익고 우리나라의 도로사정에 알맞으며 내구성과 뛰어난 연비로 인해서 판매 3개월 만에 5,600대라는 놀라운 판매기록을 세웠다. 그 이유는 오일 쇼크와 함께 세계경제가 침체되는 상황속에서 경제 적인 소형승용차를 국민들이 원했기 때문이다. 1976년 11월 19일자 동아일보에는 포니의 수출을 위한 선적장면(자료 43)으로써 외화를 획득하고 우리 경제에 기여 하며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민간외교관의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다.

한편 GM 코리아의 카라반 광고(자료 44)에서도 경제성과 실용성을 강조하고 있으나 광고효과면에서 특이한 점은 없었다. 당시에 집행된 포니의 광고 컨셉은 경제적이고 아름다운 차였으나, 브리사 11(자료 45)는 품위있고 경제적인 승용차 라는 것으로 일관했다.

IV.결 론

본 연구는 광고 메시지 특히 카피와 사진의 전체 광고물의 인식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기 위해 우리나라에 자동차가 최초로 도입되어 대중화하는 과정을 살펴보고 그로 인한 자동차 광고의 시작과 변천을 살펴보았다. 여명기와 태동기의 자동차 광고에는 사진의 특징은 찾을 수 없고 태동기 후기에 자동차 광고 사진의 성향을 크게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판매에 치중한 광고물이 많다는 점이다.

브랜드 고지와 취급안내에 급급했던 광고물들이 많았던 것에 비해 점차 광고 사진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호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광고 사진에 상징적 비주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자동차의 특성과 경쟁 체제속에서 차별화된 요소를 찾기 위해 새로운 소재를 이용했다. 상징적 비주얼을 통해 제품의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점이 두드러지게 나타남으로써 이후의 광고 사진에 상당한 변화가 있을 것임을 예측하게 한다.

셋째, 일반 소비자들의 광고 참여를 유도하기위해 브랜드와 심볼 마크를 공모했다는 점이다. 현대자동차의 포니의 론칭(launching)광고는 소비자의 관심을 최대한으로 증폭시킨 최초의 자동차 광고 사진이라는데 중요한 의미를 둘 수 있다.

넷째, 경제 개발 계획이 착실히 진행됨에 따라 상용차의 수요와 광고량도 많아 졌다는 점이다.

전반적으로 이 시기에 3사가 광고 사진 제작에 있어 많은 시행 착오를 거치 면서 사진 촬영시 스튜디오 촬영을 시작하는데 자동차 전용 촬영소가 없어서 영화 촬영 조명 장비와 영화 촬영소를 이용한 시기였기에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보완, 발전을 거듭하였다.

자동차 광고 사진의 초기부터 1970년대말까지의 한국의 자동차 광고 사진의 변화 과정은 다음과 같다. 1. 초기의 우리나라 자동차 광고 사진은 일러스트에서 사진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사실성과 친밀감에서 일러스트는 사진의 효과를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러스트 보다 사진을 사용하는 것이 광고 효과에서 더 많은 시선을 끌 수 있기 때문이다.

2. 초기에는 표준렌즈로 촬영을 한 사진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 시기는 사진 기재의 부족으로 망원 렌즈나 대형 카메라를 사용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으나 1970년대에 들어와 경제 발전과 함께 광고 시장도 넓어지고 자동차 회사도 많아 지고 판매전이 치열해지면서 광고 사진도 많아지고 광고 제작에 많이 투자를 해서 고급렌즈를 사용한 사진들이 광고에 게재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의 자동차 광고 사진에 있어 광고 사진의 매력도가 자동차 광고에 있어서 중요한 변수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에 흑백사진 보다 칼라사진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높은 광고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현재의 젊은 세대는 흑백보다 칼라에 더 익숙하며 다양한 칼라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현재의 신문(주로 젊은 독자층을 대상으로 하는 스포츠 신문)들이 칼라화 되었고 거의 모든 광고 사진들이 칼라화 되었다는 점에서 그 중요성을 엿볼 수 있다. 더 나아가 예전의 고급 승용차의 색상이 대부분 검은색 이었음에 비해 현재는 고급승용차나 일반승용차, 화물차의 칼라가 더 밝고 화려한 색으로 변화하는 것도 그 증거로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자동차 광고 사진은 칼라 사진이 많이 사용될 것임을 예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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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Historical Study of Commercial Automobile Photos in Korea

Cha, Jung-Whan

Majoy : Audio-Visual Tech.

Graduate School of

Mass Communication Chung-Ang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historical outline of commercial automobile photos from the beginning to today in Korea. Library research was conducted for the study. All the information and data in the thesis were collected from the related literature in the library. Here are some majoy findings of the study:

1) At the first stage, the commercial automobile photo began with illustration in Korea. Since the illustration was not commercially satisfactory, the automobile advertisers began to use photos rather than illustrations

2) At the second stage, photos were manipulated for the automobile advertisement. However, due to the lack of photograph equipment, the advertisers mainly used the standard lens. They couldn't use sophisticated high-quality lenses or super-size cameras.

3) At the third stage, the automobile advertisers used high-quality cameras and its equipment for commercial uses. Thus commercial automobile photos were upgraded rapidly at this stage. However, the advertised photos were mainly black-and-white

4) Along with Korea's rapid economic growth in the 1980's, the demand of both private and business-purpose automobiles has been vastly high. At this stage, the advertisers began to use upmost effects of commercial photos by using various colorful photos. Even for the newspaper advertisement, they have used color photos to meet the automobile buyers' tastes

부록:한국에서 생산된 전차종 승용차 사진 모음(초기부터 1992년까지)

각주

1) 장옥환, 교통연감(1991). (서울: 교통신문사, 1991) pp.487-509. 참조.

2) 김건기, 자동차공업편람(1991). (서울: 한국자동차공업협동조합, 1991), p.285.

3) 전응덕, '91 4/4분기 광고계 동향분석 보고서, (서울:사단법인 한국광고단체 연합회, 1992), p.6.

4) 유붕로, 신광고론 - 그 이론과 전략 - (서울:일조각, 1973), pp.155-6.

5) 김용진, 광고론 (서울:박영사, 1964), pp.101-2.

6) 앞의 책, pp.101-2, 유 붕로, 위의 책, pp.156-9. 참조.

7) 김태한, 사진학, (서울:형설출판사, 1985), p.231.

8) 안준천 편저, 상업사진요론, (서울:반도사, 1975), p.9

9). 권중인, 신문광고 사진의 표현에 관한 연구 - 의약품을 중심으로 - 계명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5,12), pp.13-4,

10) 지셀 프로이드저. 성 온경 옮김, 사진학과 사회, (서울 : 홍성사, 1983), p.106.

11) 안준천, 위의 책, p.37.

12) 앞의 책, pp.40-2.

13) 앞의 책, pp.40-2.

14) 김용덕, Illustration 측면에서의 廣告 사진에 관한 硏究,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84,11)를 참고.

15) 방재기 Illustration에 관한 연구, 홍익대학교 산업미술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1,12), p.10.

16) 김원수, 위의 책, p.251.

17) 앞의 책, p.69.

18) 앞의 책, p.252.

19) 이글은 정만수, "광고메시지와 소비자인식에 관한 연구 - 인쇄광고를 중심으로-", 광고연구, (1989, 봄), pp.53-83.을 요약한 것이다.

20) Yehoshua Tsal, "Effects of Verbal and Visual Information on Brand Attitude," Advances in Consumer Research 12(1985):265-267. 정만수, 앞의 논문 pp.53-4.에서 재인용.

21) Mark Snyder, Public Appearances, Private Realities : the Psychology of Self-Monitoring, (New York : W.H. Freeman and Company, 1987), pp.97-110, 정만수, 앞의 논문, p.54.에서 재인용.

22) 원래 정만수교수의 연구는 1988년 5월 그가 미국의 University of Missouri-Colombia에 제출한 박사학위논문으로 이것이 광고연구에 요약 발표된 것이다.

23) 김 원수, 위의 책, p.712.

24) 신 인섭, 광고학 입문, (서울:도서출판 나남, 1985), p.32

25) 전 영선. 임금님의 첫 자동차 (서울:정우사, 1992), pp.34-6.(그러나 최초의 자동차 도입에 관해서 이와는 다른 이설도 제기되고 있다. 같은 책 pp. 30-3. 참조. )

26) 앞의 책, p.37.

27) 신인섭, 한국광고사. (서울:도서출판 나남,1986), p.42.

28) 앞의 책, p.89.

29) 앞의 책, p.115.

30) 앞의 책, p.125.

31) 전영선, 위의 책, p.141.

32) 앞의 책, pp.273-274.

33) 앞의 책, pp.278-283.

34) 앞의 책, pp.293-295.

35) 앞의 책, p.300.

36) 앞의 책, pp.300-301.

37) 앞의 책, p.321.

38) 앞의 책, pp.305-308

39) 앞의 책, pp.309-313.

40) 앞의 책, pp.327-331.

41) 앞의 책, p.334.

42) 앞의 책, p.338.

43) 앞의 책, p.342.

44) 전성원, 현대자동차사, (서울:현대자동차주식회사, 1992), pp.116-9.